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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10. 2021

글 읽기와 삶 읽기

- 최시한의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을 읽고1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 선생님의 설명이나 친구의 표정, 행동 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거나 잘못 이해했던 경험이 있지는 않나요? 제대로 읽지 못하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껍데기나 허울만 볼 뿐 본바탕이나 알맹이를 볼 수 없게 되죠. 그래서는 잘 안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전이나 교과서 같은 책 들은 읽어 내기가 쉬운 축에 듭니다. 그것들은 대체로 졸가리 있게 차곡차곡 잘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기보다 훨씬 어수선하고 어지럽습니다. 법이 있고 도덕 들이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매우 질서 바른 것 같아 보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고 어지러워 생겨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책은 삶에 비해 훨씬 정돈되고 가지런해 보입니다. 마치 뒤엉킨 실타래 같아 보이는 삶과는 전혀 달라 보입니다. 소설을 두고 말하자면 책보다는 더 어지럽지만 삶보다는 훨씬 가지런해 보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글이나 소설을 읽히거나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는지도 모릅니다. 실제 삶을 닮아 있기는 하나 실제 삶보다는 덜 복잡하고 덜 어지럽기 때문에요.



<세 가지 읽기가 나란히 나아갑니다>


이 소설은 '읽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이 읽기에 관한 이야기라면 당연히 누가 무엇을 무엇이라고 읽느냐가 문제 될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무엇이라고 읽느냐 하는 순서에 따라 살펴볼까요?


먼저 누가 무엇을 읽느냐에 답해 봅시다. 곧 읽을 이가 누구이고 무엇을 읽느냐는 것인데, 이 소설 속에는 읽을 이가 제법 많이 등장하고 읽을거리는 더욱 많이 등장합니다. 읽기의 뜻을 넓게 보아 글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련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서 읽을 이는 누구이고 어떤 것들을 읽고 있습니까?


우선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인물이 <나>입니다. 나는 허생전을 읽고 있고, 왜냐 선생님을 읽고 있으며, 윤수를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철이를 비롯한 학생들도 읽고 있습니다. 학교 밖에서는 K 혹은 이경미를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 투사나 홍길동, 지하도의 행려병자까지도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허생이 등장하는 허구 세계인 소설과 왜냐 선생님, 윤수, 동철이 들이 숨 쉬는 실재 세계인 삶, 그리고 K라는 기호로 만들어낸 환상과 이경미라는 실체가 혼용된 세계 모두를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읽을거리가 가장 많은 인물로 보입니다.


나머지 읽을 이들은 모두 <나>의 읽을거리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이 소설이 일기체 형식을 따르고 있으므로 <나>가 본 대로 우리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지요. 보기를 하나 들어보죠. 윤수를 읽을 이로 볼 때 윤수는 허생전과 왜냐 선생님(혹은 학교 현실)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윤수의 허생전 읽기와 선생님 읽기는 <나>가 본 대로라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왜냐 선생님이 있습니다. 왜냐 선생님은 허생전을 읽고, 교육 현실을 읽고 있습니다. 이밖에 동철이, 경석이, 용준이 들은 허생전과 왜냐 선생님을 제 나름대로 읽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허생이라는 허구 인물과 왜냐 선생님이라는 실재 인물을 다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허생전 속의 인물들도 읽을 이로서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허생과 변부자, 이완, 도둑, 심지어는 허생의 부인까지도 세상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등장인물인 이들은 하나같이 연암 박지원이 읽은 대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소설 속에 갇힌 허구 인물인 탓이겠죠. 연암이 소설로 세상을 읽었다면 <나> 는 일기로 세상을 읽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K라는 독특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인물은 처음에는 K로 불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경미로 불립니다. 기호로 불릴 때는 <나>의 환상으로 읽어낸 존재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의 실체를 발견하면서부터는 기호를 버리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녀를 실재적 존재로 읽습니다. 그녀는 <나>를 읽고 있고, 왜냐 선생님을 읽습니다. 그리고 문학이나 연극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읽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가 그녀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지만요. 가장 폭 넓게 보고 읽는 인물이 <나>이기에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합니다.


이제까지 말한 읽을거리를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본다면 읽을거리는 쉽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하나는 허구 세계인 '허생전'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둘러싼 실제 세계인 '삶'-학교라고 해도 괜찮겠죠.-이고, 마지막은 'K'입니다. 'K'를 또 다른 하나의 읽을거리로 설정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허생전은 소설로서 허구 세계이고 따라서 등장인물들도 허구 인물입니다. 이에 비해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실재 사건들이고 인물들도 실재 인물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K 혹은 이경미를 생각해 보세요. <나>는 처음에 이경미라는 실재로 존재하는 여학생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이미지나 분위기를 보아 <나> 스스로 또 하나의 허구적인 사람을 그려 낸 것에 불과했지요. 그런 단계에서는 이경미가 아닌 K라고 불리는데, 이 경우는 허생이나 이완 같은 허구적 인물인 거죠.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해 보고 난 뒤 몹시 실망한 <나>가 K라는 애칭을 지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경미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는데, 이 경우 그녀는 왜냐 선생님이나 윤수와 같은 실재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K 혹은 이경미는 허구성과 실재성을 동시에 내포한 '인물로 보이는군요. <계속>                                             

* 출전: 이야기말꽃모임 엮음, 문학시간에 단편소설 깊이읽기, 나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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