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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동유럽에서 문득 낯선 나를 만나다

- 동유럽여행기 3 <사로잡힌 생각들>

- 거룩함이 고요함 속으로 들어와 꼭 손잡은 곳, 블레드


블레드 호수는 수정처럼 맑았다. 우리는 노 젓는 배(플레트나)를 타고 호수 위를 미끄러져 갔다. 뱃사공 야네스는 손수 노를 저으며 호수를 애무하였고, 그가 입고 나온 빨강 윗도리는 에메랄드 빛 호수와 대비되어 불붙는 것 같았다. 우리는 김일성이 아름다운 이곳 풍광에 반하여 며칠 더 묵어갔다는 ‘티토의 별장’ 옆으로 지나갔다. 소련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유고연방의 독자노선을 걸었던 주체적인 배짱남 요시프 브로즈, 최초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그의 별칭이 바로 티토였다. 나는 잠시 그를 묵상하였다.


블레드 섬에 도착하자 아흔아홉 칸의 계단을 올라 성모승천성당에 들어갔다. 성당 내부에 소원이나 사랑을 빌면 이뤄진다는 '행복의 종'을 쳐보았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신기 속의 우리 길잡이님은 종소리가 잘 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바로 그 순간 아, 나에게는 작은 깨달음  하나가 스쳐 갔다. 나의 기도가 하느님에게 가 닿을 때도 그 응답의 말씀은 결코 내 귀에는 들리지 않겠구나. 그 동안 원망하며 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 성모님, 하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섬에서 나와 간 곳은 천년 고성 블레드 성! 프레트나를 타고 앉아 쳐다보았던 그 모습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서 위풍당당하였다. 그 당당함은 너무 아름다워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유고인들에게는 건국 영웅 티토의 모습이 저러하였으리라. 나는 잠시 전율하고 다시 우리에게는 만고의 영웅 이순신이 꼭 저러 하였으리라고 눈을 감았다. 성문을 지나 들어간 성안 가장자리에서 나는 맨 먼저 성모승천성당을 건너다보았다. 섬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 아담하게 내 품안으로 폭 안기어 들어왔다. 섬을 찾아갔을 때 나를 꼭 안아주던 성모님의 포근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더 이상 하늘나라 같은 곳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박물관 이층에서 반대쪽 창틀을 액자로 삼아 블레드 시내 풍경을 내다보았다. 숨이 턱 멎을 것 같은 담백함이 눈을 맑게 씻어주었다. 여기에 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곳 풍경은 결코 사진으로 족히 담아갈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이곳 천상의 그림에는 먹물이 회선지에 번져가듯이 사람의 얼안 깊숙이 스미어 드는 숭고함이 있다. 떠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주여, 다시는 저를 이곳에 데려오지 마소서. 더 이상의 성스러움은 제게 없겠나이다.’ 하고 기도하였다.      



- 꿈속에서 본 듯한 이국 방앗간 마을에서 요정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다

 까다로운 크로아티아 국경 검문을 지나, 요정의 머릿결이라는 뜻을 지닌 마을 라스토케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쉼 없이 떨어지고 온통 물빛이요 물소리뿐이니, 이냥 물의 나라요 저냥 물의 천국이다. 하얗게 부서지면서 온종일 쏟아지는 물살 위에 기둥을 박고 살림집이나 물레방앗간을 지었다고 한다. 자국인들은 휴양소로 숙박까지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볼 수도 없게 하였다. 멀리서 사진 속에 담아보는 마을은 손톱만한 요정들이 금방이라도 날아와 짓궂은 장난이라도 걸어올 것 같았다. 요정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마 장난 끼 많은 아기 도깨비 정도나 될까?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에 들었던 크로아티아 국기의 체크문양 이야기는 다소 우스웠다. 베네치아의 총독과 내기 장기(체스)를 두어 자유를 얻었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플리트비체호수는 국립공원이었다. 비가 많이 온 바람에 호수의 물이 불어 곳곳에 나무다리가 물에 잠기었고, 배를 타는 곳까지 트래킹을 할 수 없겠다는 길잡이님의 판단에 따라, 우리는 애초 계획과는 달리, 78미터 폭포까지만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 아래까지 가는 길에도 물이 넘쳐 양말과 신발을 벗어들고 지나야 했다. 그곳에는 폭포수가 날리어 내도록 비를 맞는 것 같았다. 물은 완전 투명하여 지상의 물 같지 않았다. 신선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신선함이 온몸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아쉬움이 더욱 여운을 남기는 곳이었다.


2014년 921() 맑았다

[블레드 숙소(06:00~08:10)-블레드 섬(08:35~09:10)-블레드 성(09:25~10:10)-라스토케(14:00~14:40)-플리트비체(15:57~17:30)-자그레브 숙소(19:00~02:00)] * 현지식(크로아티아 라스토케 송어구이), 숙소(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레브로 호텔)


* 참좋은여행사 ‘2014년 이달(10월)의 베스트 여행후기’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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