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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Apr 30. 2021

본능과 자아의 변주곡

- 최은애의 수필 '상사바위'를 읽고 1-1 <내가 읽은 책과 세상>

1. 본능과 자아 1

남해금산에 오른다는 건 나에게 절실한 일이었다. 무료함을 씻을 요량으로 오른 기억이 없다. 대학시절 쏟아붓던 상사와 격정의 기억들은 상사바위에 핀 검버섯처럼 비릿하면서 아찔하다. 한번은  욕망의 바위 가장자리에서 날아오르기를 꿈 꾸었던 적도 있었다. 너무도 깊은 낭떠러지인지라 그 극한의 지점에 서면, 무중력한 야릇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아돌면서 일시에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그때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출렁이는 푸른 바람의 물결 위에 흡족히 나의 몸을 누이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갈망의 대상이 되었던 남해 금산은 서정인의  쓸쓸한 단편소설과, 이성복의 매혹적인 서정시와, 김훈의 요사스런 비평(시집 남해 금산의 서평이기도 함)을 읽으면서 몇 번 더 올라본 터였다. 그런  최은애의 수필을 소개받았던 터라 마치 그것은 부러 짜맞추기라도 한듯 장르에 구색이 맞았다. 그 무렵의 상사바위는 넋두리를 퍼붓는 만신의 몸주처럼 나를 못살도록 끌어당겼다. 


지난 겨울 주남 저수지 근처에서 나는 이 글을 처음 보았다. 이 글은 <남자의 사랑은 무모했다>로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의 읽기 체험은 쉰여덟 개의 문장들이 주루루 한 줄에 꿰인 채 매달려 오면서 나의 여린 뇌막에 착착 새겨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였다.  아찔아찔한 소름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바람에 잠시 나는 저체온증으로 몸이 떨리고 이성이 혼미하였다. 타고난 입담인지 정치한 짜맞춤인지 모를 쉰 아홉 개문장들은 쉰아홉 개의 파편들이 아닌 단 하나의 줄기로 엮인 채 딸려왔다. 어느덧 나는 저 아득한 이드의 심연한 계곡 속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름 모를 남자의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고막을 쥐어뜯고, 가장 솔직한 연애를 갈망하는 내면의 피들이 일제히 용솟음치는 광경을 보았다. 의식은 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환시 앞에서 넋이 빠져 허우적거렸고, 신지핀 무당 할매의 미친 활개짓마냥 낭자하여 황망하였다. 


이러한 때 나는 감동이라는 말 따위가 무용지물임을 안다. 감동이란 감동하는 그 순간에는 언제나 부재할 수밖에 없다. 단지 감동의 그림자만이 형체 없는 어떤 언어에 어지럽게 얽히고설킨 채로 실려서, 쏟아지는 떨림에 대한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가 느닷없는 어느 순간에 불쑥 나타나곤 하는 법이다.


이 글은 천년 묵은 나의 온갖 동물적 행각들과 음란한 생각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그 어떤 인간관계에 대한 내밀한 몽까지 역력히 퍼 올리게 했다. 사탄의 후예인 양 부끄럽고 뻔뻔하고 죄스러워 하던 일체의 어두운 감정들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서술어를 잃어버린 여덟 개의 문장을 빼고 나면 겨우 쉰하나밖에 남지 않는 이 짧은 글을 놓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이 밝아졌을 때 나의 본능과 자아는 기괴한 변주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나의 이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고 싶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어느 독신자 아파트이거나 그녀가 숨어서 혹은 도망 다니며 일하고 있을 어둡고 외진 지하 화실 같은 곳들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어느 때인가 사람이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녀의 행적에 관한 풍문에 목이 달았다. 나의 욕망은 끝 간 데 없이 자라 온 내 불안의 뿌리를 찾아내어 쑥 뽑아 버리고 싶은 데에 있었다. 불안의 심심산천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상사가 앙금으로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기어이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서 마주 서 보리라는 꿈을 꾸었다. 누구는 거기서 상사를 풀고 사랑을 이루었다고 하고, 혹 누구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여 비극적 혈흔만을 그 바위에 남겼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랑도 상사도 아닌, 이미 식어버린 과거일 뿐이다. 나와 그녀가 남긴 그림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람과 산과 바위와 바다들처럼 홀라당 옷을 벗고 세월의 때를 받아 들이며 서 있을 뿐이다. 남해 금산 상사 바위에 올라서면 한 발 앞에 바다가 깊고 또 한 팔 위에 하늘이 높다. 그녀의 가장 깨끗한 빈틈에다가 나는 지난날 나라는 소년과 나누었던 아픈 본질을 명확하게 끼워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련이 아닌 한 순수와 한 욕망의 사귐이라는 정체불명의 정체가 또한 둘처럼 솔직히 한 꺼풀 더 옷을 벗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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