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해요. 주인공이란 게 뭐죠. 우리가 소설을 두고 누구의 이야기지 하고 의문을 가져 본다면 그 누구가 바로 주인공이 아니겠어요? 누구의 이야기냐 하는 의문은 곧 이야기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가장 중심이 되고 이야기의 초점이 되는 인물이 누구냐 하는 의문과 같은 거예요. 따라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가장 무게 있게 다루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렇다면 그 인물은 작품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여 가장 나중까지 살아남은 인물이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죠디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죠디는 세 인물 가운데 홀로 성격이 바뀌고 있어요.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견주어 보았을 때 죠디는 무엇보다도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은 어른과 생쥐사냥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죠. 우선 죠디는 처음에 할아버지를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어요. 할아버지는 무엇이든지 다 멋지다고 여긴 거죠. 할아버지의 대륙 횡단 이야기가 죠디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끝 장면에서 죠디는 할아버지를 동정하고 격려하게 되었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때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없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를 비난하죠.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금방 말을 바꾸어 변명하려 들어요. 죠디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웠어요. 몹시 두렵고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점을 보게 된 셈이죠.
죠디로서 그토록 열망했던 생쥐 사냥이 왜 한 순간에 시들해져 버린 것일까요? 그건 분명 할아버지의 실의와 무관하지 않겠어요. 할아버지의 실의는 죠디에게 엄청난 자극이었을 거예요. 그 자극이 죠디를 바꾸고 있어요. 이야기가 처음 시작될 때 보았던 죠디는 상당히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쪽이었잖아요. 생쥐 사냥을 두고 빌리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함을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어른들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어요. 그렇던 죠디가 이야기 말미에 와서 제 스스로 할아버지를 위해 레몬주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죠디의 변화는 어머니가 깜작 놀랄 정도의 큰 변화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립이 나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스스로의 깨달음 덕분이라고 봐야 해요. 이렇게 본다면 죠디는 달라졌고, 그 달라짐은 발전이나 성장으로 볼 수 있을 거죠. 따라서 죠디가 주인공이라면 이 소설은 죠디의 성장을 그린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이 소설에서 주요인물과 시간을 연결해 본다면 카알이 토요일 오후, 할아버지가 토요일 저녁(밤), 죠디는 일요일 아침으로 대응될 것 같아요. 좀더 시간대를 확장해 본다면 할아버지가 과거, 카알이 현재, 죠디는 미래로 대응될 것 같구요. 죠디는 넓게 잡더라도 낮과 아침 정도이겠는데, 이 시간의 대목에서는 시점이 완전히 죠디를 따라 가고 있고, 또 죠디의 눈에 비친 두 어른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아니에요. 따라서 이 소설을 읽은 이로서는 자연히 죠디의 깨달음에 주목하게 돼요. 아침 시간은 죠디가 크게 깨닫는 시간이므로 이 시간을 죠디의 시간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게다가 죠디가 할아버지를 위해 레몬주스를 준비하는 사건은 지금까지 보아 온 죠디의 행동과는 상당히 발전된 모습이기에 더욱 그래요.
그러면 죠디가 행동하는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죠디는 특별한 공간의 임자는 아닌 듯해요. 목장이 아버지 카알의 공간이라면 대평원은 할아버지의 공간이고, 목장 안이 카알의 공간이라면 목장 바깥이 할아버지의 공간인 셈이죠. 이러한 구조에서 죠디는 자신의 삶은 목장에 두고 있으면서, 욕망은 대평원에 두고 있고, 목장 안에서부터 목장 바깥(어귀)까지 드나드는 인물이에요. 따라서 죠디의 공간은 따로 설정할 수는 없고, 카알의 공간과 할아버지의 공간을 아우르면서 계속 넘나들고 있으므로 두 공간 모두 죠디의 공간이라 할 만해요. 이러한 속성은 카알의 시간이 중간 지대로서 할아버지의 과거 시간과 죠디의 미래 시간의 어름에 걸쳐 있는 것과 닮았다고 볼 수 있겠어요.
<가족 이야기>
이 이야기는 목장에서 일어난 죠디 가족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은 할아버지, 카알, 죠디 해서 모두 세 사람이에요. 이 가운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줄곧 대립된 관계에 있는데,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서부개척 시대 이야기를 두고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요. 할아버지는 그 일이 엄청나게 소중하고 값진 일인데도 요즈음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 것에 못마땅해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건 오로지 죠디와 같이 어린 아이들 뿐이라는 것에 서글퍼 하기도 하죠. 이에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중하고 값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고 보면, 너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 사이에 죠디가 있어요. 죠디는 아버지 카알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할아버지를 잘 따르는 손자죠. 그런데 죠디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대립 때문에 성격이 바뀌고 있어요.
따라서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기만 하는데, 그 손자가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3세대가 1세대에 대한 2세대의 비판을 발판으로 1세대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보이네요. 따라서 이 가족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화할 만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도 세대 차이는 있는 법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이 미국이야기는 왠지 염상섭의 '삼대'와도 닮아보였어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끝>
* 주요섭 외 공편, 현대영미단편소설감상, 한일문화사 [원제] Understanding Short Story,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