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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Apr 27. 2021

숨은 지도자

- 존 스타인벡의 '민중의 지도자'를 읽고 2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먼저 아버지께 여쭈어 보는 게 좋을 게다.>


할아버지는 대륙 횡단에 얽힌 이야기 속에서 사시는 분이에요. 그때의 모험과 영광을 한 시도 못 잊으시죠. 모든 삶의 중심에 그때 이야기를 놓으시고, 무슨 일이든 그때에다 다 끌어다 붙여요. 오로지 그때 일밖에는 모르는 사람처럼요. 이쯤 되면 ‘민중의 지도자’는 다분히 냉소적이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리 수도 있어요. 할아버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값진 이야기일지라도 카알에게는 따분하고 짜증나는 늙은이의 무용담에 지나지 않는 거죠. 왜 그럴까요? 카알의 사람됨이 냉정하고 야박한 탓일까요? 이유가 그거라면 빌리나 카알의 부인은 할아버지 이야기에 빠져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 죠디는 어머니를 보았다. 얼굴 표정으로 보아 어머니는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였다. 카알은 엄지손가락에 못을 집어 뜯고 있었고, 빌리․벅은 벽을 기어 올라가는 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는 척할 뿐 진지하게 듣지는 않고 있지? 빌리와 어머니가 카알과 다른 점은 할아버지를 두고 비난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이야기에 매달리는 일은 카알 뿐만이 아니라 빌리나 죠디 어머니에게도 매우 갑갑한 일이 되고 있다고 봐야죠.


이렇게 본다면 카알이 주인공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과거에만 빠져서 현실 감각이라곤 도무지 없이 사는 옛 세대들에 비하면 카알은 매우 현실적이고 조직적이며 통솔력 있어요. 빌리나 죠디는 카알에게 매우 순종하는 것 같고, 티플린 부인도 친정아버지 일만 빼면 카알을 잘 따르고 있어요. 이만한 지도자도 없지 않겠어요. 또 카알이 등장하는 빈도수나 시간 정도도 할아버지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듯하구요. 갈등을 이루는 축에서 볼 때도 그 무게가 결코 할아버지에 뒤지지 않아요. 카알은 현실적으로 할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었어요. 이쯤이면 카알도 주인공이 될 만하지 않을까요? 카알이 주인공일 수 있다면, 현실 감각 없이 한때 영광스러웠던 과거에만 빠져있는 할아버지와 같은 옛 세대들은 비판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카알은 할아버지에게 견주자면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그런 만큼 카알이 활약하는 시간대는 토요일 오후예요. 하루 중 오후 시간은 아침과 저녁의 중간 즈음에 해당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옛 세대인 할아버지와 새 세대 죠디의 중간에 놓인 중간 세대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따라서 티플린 부인이나 빌리․벅 또한 중간 세대이며 이들 또한 토요일 오후의 행위들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역시 현재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친 시간이므로 카알의 시간은 죠디나 할아버지 시간보다는 모호한 것 같아요.


카알이 등장하는 공간도 눈여겨 볼 만한데요. 목장을 중심으로 볼 때, 할아버지는 목장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인물이고 죠디는 목장 안과 바깥을 드나드는 인물이며, 카알은 목장 안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목장이야말로 카알을 상징하는 공간일 수 있겠는데, 카알이 목장 주인이라는 점도 이를 잘 말해 주죠. 그리고 목장은 카알 가족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해서, 현실적이고도 일상적인 공간이죠. 그런데 할아버지의 공간인 대평원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세밀하면서도 폐쇄적이라는 느낌이 들잖아요? 세밀하게 묘사된 것은 주된 배경이 되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폐쇄적이라는 느낌은 좀 뜻밖인가요?


“산등성이의 잔 숲을 우수수 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려 왔지만, 오목한 이 목장 터에는 한 점의 바람도 스며들지 않았다.”


이 대목은 목장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고 닫혀 있는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마치 카알이 할아버지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태도와 닮은 것 같아요. 목장이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있듯이 카알은 다른 사람, 다른 세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겁니다. 따라서 장인인 죠디의 할아버지와도, 죠디와도 부드러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계속>         


* 주요섭 외 공편, 현대영미단편소설감상,한일문화사 [원제] Understanding Short Story,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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