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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동유럽에서 문득 낯선 나를 만나다

- 동유럽여행기 5 <사로잡힌 생각들>

- 주여, 왜 저에겐 갈망만 주셨나이까?

부다패스트를 떠나며 듣는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과 그에 이어지는 유키 구라모토의 아련한 피아노 연주 가락은 먼 동방에서 온 나그네의 쓸쓸함을 더욱 애절하게 하였다. 드넓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지금 어딘가로 다시 떠나야 한다는 객창감은 노랫가락의 마디마디에 실려 한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세 시간 남짓 버스는 비엔나의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길잡이님이 마이크를 잡고 베토벤이 살았던 곳임을 일깨워 주었다.


베토벤은 사람들에 의해 자주 모차르트와 견주어진다. 고전주의의 절정에 올랐던 모차르트에 비하면 베토벤은 고전주의의 형식을 깨면서 낭만주의를 시작한 음악가이다. 모차르트와 달리 장중하고 무거운 음률들을 많이 썼고, 그의 표정은 늘 고뇌에 쌓인 듯했으며 그의 악보는 도대체 몇 번을 다시 고쳤는지 알 수 없을 만치 지저분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음악가였다고나 할까. 아버지가 억압적으로 음악을 가르치고, 열다섯 명이나 되는 여인들과 사귀었으며, 하이든의 제자였으나 끝내 그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점, 그러나 영광스러웠던 말년 생활 등은 베토벤이 얼마나 모차르트와는 다르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쉰일곱 살에 죽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에서 엄청난 납 성분이 검출된 일화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 마라토너 황영조와 이봉주가 떠올랐다. 타고난 체격조건을 갖춘 황선수와 체격의 불리함을 노력으로 이겨내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던 이봉주! 이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눈다면 ‘타고난 사람’과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든 평범한 자들의 신이었던 살리에르가 외치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주여, 왜 갈망만 주시고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 쉔부른 궁전에 피어난 꽃,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우라

 비엔나를 구경시켜 줄 길잡이(최경렬) 뒤를 쫄래쫄래 따라 갔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아름다운 샘’  쉔부른 궁전이었다. 처음에는 소박한 별장 정도로 지을 생각이었으나 마침 그 무렵 짓고 있었던 베르사이유 궁전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더욱 화려하게 지었다고 전한다. 궁전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게 했다.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연주를 끝내고 마리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을 비롯하여 궁전 내부를 둘러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라는 한 여성의 인생을 들었다. 그 중에 시장에서 원숭이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이를 잡히는 그림은 참으로 낯설면서 재미있는 풍속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림처럼 날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들려주는 길잡이의 현상학적 분석은 참으로 냉혹하였다.


16세기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 합스부르크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카를 6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사위 프란츠 슈테판(로트링겐 공)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후이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소유권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보헤미아의 여왕, 파르마 여공을 겸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적들과 맞서 싸우는 동안 강인한 의지와 노련한 외교술을 보여줌으로써 나약한 여성이 아닌 한 명의 뛰어난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명백히 입증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남편 프란츠 슈테판은 당시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선남선녀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슈테판은 밝고 친화력이 있는 성격으로 카를 6세도 썩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 어느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유능하고 힘 있는 군주였지만 막상 가정으로 돌아오면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아내였다. 그녀는 평생을 두고 남편을 대단히 사랑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16년간 상복을 벗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는 10명이었으며,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함으로써 200여 년간 적으로 살았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했다. 오스트리아의 선화공주인 셈이었다.



- ‘키스는 결코 벨베데레 궁전을 떠나지 않는다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벨베데레 궁전은 18세기 초 오이겐(유진이라고도 부른다고) 왕자가 지은 것으로 거장 힐데브란트가 건축을 맡았다고 전한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손에 넘어가면서 벨베데레라고 불리었고, 황실의 그림전시장으로 이용되었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 역시 궁내 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예쁜 그림을 온전히 가져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찌꺼기로 남는다. 마음의 망막 위에 새겨가는 일이 더 종요로움을 잘 알면서도 늘 이 모양이다. 우리는 궁전 왼쪽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길잡이님이 입장권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잠깐 스핑크스 조각상 앞에서 머물렀다. 여자의 상반신을 하고 있는 스핑크스는 젖가슴 부분이 새까매져 있었다. 이 또한 기복을 빙자한 본능표출의 놀이공간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올라 왼쪽 방으로 들어가려니 먼저 온 관광객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키스’가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응, 뭐지?’ 했지만, 아,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황금색의 늪, 묘하면서도 기막힌 디자인 같은 구도, 이상야릇한 색감과 분위기가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남자는 강하고도 곧은 목선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둥이가 만들어내는 라인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고 있지 않은 네모꼴에 가까웠고, 짙은 검푸른 빛으로 된 크고 작은 직사각형의 무늬로 수놓은 듯했다. 이에 비해 남자의 완강함에 지배당하면서도 끌려가고 있는 여자는 우선 목이 90도 가까이 꺾인 채로 남자의 얼굴을 향하여, 더 정확하게는 남자의 입술을 향하여 사로잡힌 채 곧 부러질 듯이 아슬아슬하게 온 그림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을 이루는 선은 비엔나 근처를 지나치는 다뉴브강의 물줄기처럼 부드럽게 흘러 다녔고, 온통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금빛무늬들이 그녀가 성적 볼모가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 근처에 해당하는 하의에는 수십 개의 꽃무늬가 울긋불긋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여자의 뇌리가 느끼고 있는 키스의 날카로운 쾌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곧은 선 안에 어두침침한 색감으로 시작하여 금빛 배경 속으로 그 본능적 지배욕과 음탕함을 잔뜩 숨기고 있었고, 여자는 부드러우며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남자에게 사로잡힌 채, 질식할 것만 같은 목 꺾임으로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자는 살아있는 죽음으로 살아있었고,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절정 속에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바깥 테두리 선은 어쩌면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이들 둘은 서로를 향하여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릎으로 서서 서로를 애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길잡이의 설명이 간략하게 끝나고 다른 그림으로 옮아가고 있음에도 나는 꼼짝 없이 키스 앞에 서 있었다. 서양인 짝지 둘이 키스 아래에서 키스하는 풍경도 감상하면서 잠시 흐뭇하였다.



- 뜻밖의 매혹, 에곤쉴레의 구렁텅이에 빠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에밀리플레게(연인), 아담과 이브, 신부 등을 감상한 다음, 길잡이의 설명은 에곤쉴레 방에서도 계속되었다. 클림트의 제자로도 잘 알려진 에곤쉴레는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 탓이었는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독학으로 미술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클림트를 만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점차 클림트적인 초기 화풍에서 벗어나 다다른 곳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들로 독특하게 구성한 그만의 작품세계였다. 특히 그가 그린 여인과 소녀들은 다소 선정적인 누드화들이 많았으며, 그로 인하여 감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한때 클림트의 후계자로 이름이 나기도 하였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고, 그도 같은 병으로 나흘 만에 죽음으로써, 스물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그림은 불편하였다. 칙칙한 색감과 거칠기 그지없는 선들은 그로테스크한 끔찍함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찡그리게 한다. 에곤쉴레의 작품 앞에 서면 발걸음을 서성거리게 댄다. 오래 보고 있지 못하는 불편함과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없는 흡입력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이라는 그림 앞에서 망연자실하였다.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아내가 스페인 독감에 걸린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이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에곤쉴레는 삶을 전쟁터로 보았고, 사람을 전쟁이 남긴 잔학함으로 본 것 같다. 전쟁 같은 삶과 주검 같은 사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누구나 죽은 사람 같았고, 실낱같은 숨을 쉬기 시작할 것 같기도 한 주검 같았다. 음울하고 침통한 죽음의 긴 터널 속에서 만난 사람들 같았다. 에곤쉴레의 어두운 색감들과 거친 터치는 내 가슴의 어딘가 금간 틈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 뜻밖의 감동은 나를 놀래키는 동시에 기쁘게 하였다.



- 최초의 순교가 남긴 거룩한 신앙심, 성 슈테판 성당

성 슈테판 성당은 빈 대교구의 성당으로 오스트리아의 혼이며 빈을 상징하는 최대 고딕건축물로, 성당이름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슈테판 성인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성당의 정문 위에는 예수님을 가운데 모신 두 천사를 돌로 새겨 놓았고, 입구는 서쪽으로 나 있는데, 신도들이 앉은 자리가 예루살렘이 있는 동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당내부에 들어서자 높고 우아한 아치들이 웅장하게 솟아오르며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들이 붐볐기 때문 제단이 보이는 장소를 찾기도 힘들었다. 나는 왼쪽으로 걸어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곧 미사가 시작될 모양으로 성가대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성당 벽 쪽으로 마련된 자리에 와서 앉기 시작했다.


성 슈테판 성당의 거대하고 길쭉한 창문들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고 차분하였다. 나는 동쪽으로 향하여 배치된 자리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왼쪽에는 키 작은 촛불들이 기도하는 신도의 옆모습 은은히 비추며 흔들리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촛불대와 성녀 소화 데레사 수녀님의 초상화 사이에 서서 어둑한 성당 내부와 숭고한 솟을천장과 그곳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성당 안은 어둑했지만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이 지배하고 있었다. 성녀의 맑고 온화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좋은 기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프라하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 길잡이님은 이 곳 성당에서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기에 성가대 생활을 하였고,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슈테판 성인은 오히려 죽음으로써 사람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되리라는 그 분의 말씀이 들리는 듯했다.     



- 비엔나에서 프라하까지 세 시간 삼십 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오는 길에 길잡이님은 체코와 프라하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란쿤데라, 프란츠 카프카, 안토닌 드보르작, 체 게바라, 이안 후스, 이안 네포무츠키 등이었고, 그와 관련된 세계사를 망라하고 있었다. 68혁명과 프라하의 봄, 미소 이념대립의 냉혹한 빙하기, 100년을 앞질러 살았던 종교개혁자, 길잡이님의 유럽사 지식은 무한대여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덕택에 우리는 무게 있고 깊이 있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이 잠시 일상을 떠나 다른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여행의 의미 또한 여행에서 접한 많은 삶들을 제 삶에 비추어 얻는 깨달음에 있을 것이었다. 길잡이님은 우리의 발길이 닿는 데마다 그곳에 얽혀 있는 사람과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하였고, 일상에 두고 온 것들을 간절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은 낙엽처럼 가벼웠지만, 그들의 바싹거림은 내 심금을 울리었고, 그 울림은 오래토록 여운이 되어 남았다.      



- 총을 든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 머물렀던 프라하의 아파트는 어디쯤인가


 ‘변신’, ‘성’, ‘심판’ 등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 이야기도 좋았고, 민족주의 음악가 안토닌 드보르작의 음악 이야기도 좋았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잡아 흔들었던 이야기는 체 게바라였다. 가요계의 거장 비틀즈와 함께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인으로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던 사람이었다.


체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극히 가난했거나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르헨티나의 백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실제 1953년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에 체의 피는 너무 뜨거웠다. 그해 여행하는 동안 남미 혁명가들에게 감명을 받은 체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가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게 된다. 언젠가 체가 프라하의 한 아파트에 머물 때 썼다는 시다. "휴대용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비틀즈의 노래를 듣는다./저 음표 어딘가에/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이유가 숨어 있으리라("비틀즈"중)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성공이후 눈앞에 열린 권력의 열매를 따먹기를 거부하고 순수한 초심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불과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르트르가 그를 가리켜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던 만큼, 그는 죽은 뒤에 오히려 그 영향력이 더 커져갔다. 국가 권력에 묶여 있었던 세계의 모든 비권력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태양처럼 떠올랐고, 전 세계의 독재와 압제 하에서 일어났던 여러 혁명 속에 그의 이름은 깃발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프랑스의 68혁명에서 그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이후 이념은 사라져도 체 게바라는 상징으로 굳게 남았다.


그는 일평생을 그가 처한 상황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맞서 싸웠다. 바로 부조리와의 싸움이었다. 그가 지향하는 바가 비록 그 시대의 삶 속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그의 싸움방식은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부족한 자원 속에서 효율적인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는 총을 들었지만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의 평전을 처음 읽었던 그날 밤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실적이 되어라.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어라.”



- 카를교 위에서 프라하의 밤풍경을 보다

버스에서 내려 쫄랑쫄랑 길잡이 뒤를 따라 밤거리를 걸어간다. 밤거리는 벌써 쌀쌀한 가을 냄새에 젖어 있었다. 가스등은 희미하고 은은하게 중세시대부터 거기에 있어온 것 같은 돌바닥 길을 비추고 있었다. 유럽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한국만큼 밤거리가 밝고 화려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은근한 멋을 잃어버린 것이다. 너무 빤한 사실만 존중받는 사회, 은은한 진실이 외면당하는 나라, 한 번쯤 반성해볼 일이다.


카를 4세의 동상 앞에서 바라본 카를교는 훨씬 더 어둑하게 어둠 속에서 숨바꼭질 하듯이 은밀한 멋이 있었다. 다리 양쪽 난간을 따라 세워진 동상들은 어둠에 가리어 그 형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실루엣 뒤로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의 불빛들은 황홀하였다. 이 풍경을 한 해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고 간다 하니 놀라운 일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동상 앞으로 갔다. 성인인 듯 머리 위에 다섯 개의 별모양으로 후광이 달려 있는 동상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안 네포무츠키 신부님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왕비 소피아의 고해내용을 묻는 왕 바츨라프 4세에게 끝내 침묵했던 네포무츠키 신부님, 왕은 화가 나서 그의 혀를 자르고 발에 돌을 달아 카를교 아래 블타바 강에 던졌다. 그때 강물 위에 별 다섯 개가 떠올랐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분의 일생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비엔나에서 이곳으로 오는 버스에서 들었던 바로 그 성인이시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해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가며 그분의 발치를 만지며 기도하였다. 사람들이 줄지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니 사람은 기도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923() 맑았다

[부다패스트 숙소(05:30~07:35)-비엔나(10:10~15:00)-프라하(19:00~21:30)-프라하숙소(22:10~01:30)]   

* 점심(현지식 : 호이리게), 저녁(한국식 : 된장찌개), 숙소(체코 프라하 윌니스호텔)  


* 참좋은여행사 ‘2014년 이달(10월)의 베스트 여행후기’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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