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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r 21. 2021

동유럽에서 문득 낯선 나를 만나다

- 동유럽여행기 6 <사로잡힌 생각들>

- 100년을 앞서 살았던 종교개혁자, 이안 후스


프라하의 길잡이를 따라 카를교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다. 어제와는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 카를 4세 동상 앞을 지나 골목길을 걸어 구시가 광장으로 나왔다. 아침 나절의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는 미인의 민낯을 보는 느낌이었다. 블타바 강물은 흙빛이었으나 왠지 반짝이는 느낌이 있었고, 다리 난간에 선 동상들 하나하나 프라하의 역사를 말해주었다. 우리는 이안 후스 동상 앞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의 성경번역자 위클리프의 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터보다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주장하였던 선지자였다. 후스는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했으며, 콘스탄트 공회에서 화형을 당했지만 100년 후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  오백 년 된 시계는 아직도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열시 오분 전, 프라하가 가장 자랑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인 오를로이 천문시계 아래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구시청사 한쪽 벽면에 30m 크기로 만들어진 천문시계가 매시 정각을 알리는 타종 퍼포먼스를 보기 위해서란다. 우리도 수신기에서 들려오는 길잡이님의 목소리를 따라 갔다.


프라하 천문시계는 1490년 두 명의 시계공과 한 명의 수학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완성된 시계가 너무 아름다워 당시 동유럽의 귀족들이 시계공 하누쉬에게 자기 나라에도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프라하 시의회는 천문시계를 독점하기 위해, 새벽에 장정 다섯 명을 보내어 그의 양팔과 양다리를 포박하고 불에 달군 인두로 눈을 빼앗아 버렸다고 한다. 이후 슬픈 마음을 안고 마지막으로 탑에 올라간 하누쉬가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는 그대로 작동을 멈추었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860년, 400년이 지난 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는 이 시계의 작동법이나 퍼포먼스의 의미에 대한 설명보다도 이 시계에 담겨있는 애민사상에 감화되었다. 두 개의 시계 판 가운데 아래쪽 시계 판은 시곗바늘 없이, 모든 것이 그림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가운데는 프라하의 마크가 그려져 있고, 그 주변의 작은 열두 개의 원은 황도 12궁을 나타내며, 그 위의 큰 그림은 농경의 단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씨 뿌리고, 타작하고, 추수하는 등의 체코의 농경사회를 월별로 나타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침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이번 달의 별자리이며, 이번 달에 체코의 농민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글을 모르는 농민들을 배려해서 만든 그림판 달력이라는 설명 부분에서 나는 아, 하고 감탄하고 말았다. 그것은 왕과 귀족을 위해 만들었던 위쪽 판이 기호와 숫자로 이루어진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 시기면 우리에게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던 1443년과 때가 비슷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또한 닮았다고 생각하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 몸보다 아꼈던 옛 지도층 사람들의 사랑이 느껴졌다. 요즘 우리 정치인들이 새삼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다.   


  

- 프라하 광장을 지나며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다


체코가 낳은 또 하나의 거장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68혁명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체코슬로바키아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이야기는 나에게 낙엽 하나가 바람에 날리다가 진득한 진흙 위에 달라붙게 된 이야기 같이 느껴졌다. 인생을 한없이 가볍게만 살아가던 젊은 외과의사 ‘토마스’, 그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 ‘사비나’, 진지하고 진실한 사랑을 갈구했던 순수 처녀 ‘테레사’.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드라마가 나에게는 왜 낙엽과 바람과 진흙 같이 여겨졌을까? 이 소설은 미국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다. 어처구니없는 번역이었다.  


프라하 광장을 지나갈 때 나는 줄곧 소설과 영화의 장면이 헷갈리면서 자꾸만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느닷없이 나타난 소련제 탱크의 견고함과 육중함, 쇠 비린내는 참을 수 없는 구토를 일으키면서 숨통을 틀어막았다. 가차 없이 깨고 부수면서 돌진하는 소련제 철갑탱크의 무지막지함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비인간적 만행을 잘 보여 준다. 숨을 쉴 수 없다는     것은 제 몸의 자유 의지가 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왠지 나에게는 줄리엣 비노쉬보다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레나 올린의 연기가 훨씬 더 삶에 도전적으로 보였고 공감되었다. 사비나의 깨어진 거울조각 예술은 자유를 빼앗긴 자들의 내면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이곳 프라하 광장에서 우리의 광주를 똑똑히 보았지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도 탱크 같은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 걸고 대항했던 자랑스러운 민주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목도할 뿐이다.    


  

 -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롬로프까지 바흐와 헨델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프라하를 떠날 무렵 길잡이님은 웬 일인지 바흐와 헨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찰즈부르크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교해 주었던 것만큼이나 재미있는 신나는 이야기였다. 바흐와 헨델은 1685년 같은 해 비슷한 시기에 똑같이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음악적 기질과 성향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바흐는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은 극히 문법적이고 이지적이며 궁전을 중심으로 한 경건하였고, 복잡한 수법인데도 불구하고 영혼의 약동과 정서가 풍기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숭고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면서도 장엄한 감동을 주는 음악은 바흐 뿐이다. 베토벤이 그를 가리켜 화성의 아버지라고 극찬한 이후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음악의 아버지라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바흐와는 달리, 헨델의 음악은 명쾌하고 호탕하며 신선하였고, 생생한 리듬은 성악 같으며, 주제의 조화로운 발전, 색채적인 하모니와 선명한 멜로디는 그를 추종할 작곡가가 없었다. 헨델은 또 당시 귀족 중심의 음악 풍토 속에서도 대중들을 위한 음악을 많이 만들어 그의 폭넓은 음악세계를 보여 주었다. 헨델은 바흐와 달리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말년에는 영국인으로 귀화하여 영국의 음악가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이다.   


  

- 시간이 빗겨간 작은 중세마을, 체스키크롬로프

 버스를 내린 곳에 체스키크롬로프의 안내지도가 있었다. 지도를 보니, 마치 우리나라 하회마을 보는 것 같아 묘한 동질감을 느꼈지만, 그러한 느낌은 다소 시시한 것이었다. 우리는 찻길을 건너 몇 분을 절벽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줄을 서서 걸어갔다. 얼마쯤 가니, 아치형 교각으로 웅장하게 버티어 선 삼층 짜리 건축물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밑으로 지나갔는데, 이곳이 말하자면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었는데, 이름이 ‘망토의 다리’라고 했다. 이 길도 옛날에는 해자였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다리는 서쪽 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스비치코바’의 맛은 매력적이었다. 달콤하고 황홀한 첫 키스 같은 맛이었다고나 할까? 같은 식당에서 2유로에 맛본 흑맥주 한 잔 또한 매혹적인 깊은 맛이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식당 문 밖으로 나오자 보헤미안 길잡이가 우리를 안내했다. 오르막길을 따라 스보르노스티 광장까지 올라갔다. 이 광장은 구시가의 중심으로 중세 분위기가 남아있었고, 주변에는 후기 고딕양식 등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이 늘어서 있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은 아기자기한 수공예품 상점과 카페가 가득하고, 길거리에는 관광객로 붐볐는데, 한국 사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길잡이는 그곳의 패스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1715년 삼위일체 기둥을 세워 페스트가 사라진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였다고 한다. 반대편으로 돌아보니 현재 시청사로 쓰고 있는 건물 벽에는 네 가지 종류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곳을 다스렸던 영주들의 문양(비텍, 로젬베르그, 에겐베르그, 슈바르젠베르그)이라고 했다.


이어 이발사의 다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체스키 크롬로프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체코의  말발굽’이라는 뜻이라 한다. 블타바 강이 이곳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모양이 말발굽 모양을 닮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만도 300곳이라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발사의 다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상과 이안 네포무츠키 신부상이 양쪽 난간에 서 있었다. 이발사의 다리에 얽힌 이야기는 참으로 애절하다. 옛날 체스키라는 아름다운 마을에는 이발사가 살고 있었는데 이발사의 딸은 체스키 마을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한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왕이 그 딸의 외모에 반하여 결혼하기로 했다는데, 얼마 후에 그 딸은 누군가에게 죽은 채로 발견된다. 광분한 왕은 마을사람들을 의심하여 하나씩 죽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이발사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자기가 딸을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이 이발사를 성인으로 추모하면서 이 다리를 하나 만들고,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발사의 아픈 가슴이 절로 느껴지는 이야기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왕의 장인이 될 뻔했으니, 그 살인범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러나 이발사는 권력과 명예에 대한 미련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대한 미움마저 내던져 버린 채, 선선히 제 목숨을 던져 무고한 사람들을 구한 것이었다. 성인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인가?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 이발사의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거리가 ‘라트란’ 거리다. ‘도둑’을 뜻하는 ‘란트란’ 거리를 지나 좁은 고샅길 계단을 따라 몇 분을 올라갔다. 붉은 아치형의 나무꽃문양이 있는 문을 지나 우리는 체스키 성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은 옛날 해자였던 곳으로, 적의 침입을 막거나 영주가 죄수를 죽일 때 쓰던 곳이라 한다. 아직도 곰을 기르고 있었다. 벽화가 그려진 성 안과 정원이 꾸며진 성 안을 차례로 구경하면서 점점 위로 올라갔다. 정원이 있는 성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다. 관망대처럼 만들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다. 풍광이 마치 원색의 물감으로 색칠을 한 것처럼 산뜻하고, 마을의 집들이 색종이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각지고 깔끔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한결같다. 망자의 다리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산언덕의 계단을 걸어 700년 역사의 그림 같은 고성을 빠져나왔다. 나는 마치 꿈결 속을 잠시 거닐고 나온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는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버스를 달려, 독일 테네스버그에 닿았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 되어서야 높다란 교회 종탑이 있는 조용한 시골 호텔 앞에서 내렸다. 해가 막 지고 있었고, 마을은 고즈넉했고, 잠 잘 방은 검소하였다. 로비의 뒷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반 지하처럼 생긴 어두운 복도로 내려간 곳에 내 방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여러 사람들과 같이 마을길을 돌아다녔는데, 겨우 아홉시인데도 마을길은 어둑어둑하였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도 흐릿하였고, 소리라고는 간혹 지나가는 자동차 엔진 소리뿐이었다. 옛날 우리 시골 마을의 적막함 속으로 돌아간듯이 포근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2014년 924() 아주 맑았다

[프라하 숙소 출발(06:30~08:30)-프라하 시가(09:00~10:30)-체스키크롬로프(12:50~ 15:30)-테네스부르크 숙소(18:40~01:00)]

* 점심(현지식 스비치코바), 숙소(Schonsee 근처 테네스버그 부르처 호텔)   


* 참좋은여행사 ‘2014년 이달(10월)의 베스트 여행후기’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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