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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May 21. 2021

이성계 이야기

- 남해군의 옛이야기 1 <옛이야기 속으로>

이성계는 왕이 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북쪽 끝인 백두산에서 남쪽 지리산까지 전국의 명산을 두루 섭렵하며 자신의 운명을 산신령에게 물었지만 어떤 산에서도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리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역시 산신령의 감응이 없어 포기하고 떠나려는데 멀리 남해의 영산인 보광산이 보여 그 영험한 기운에 끌려 바다를 건너서 섬으로 들어왔다.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찬탈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차마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해금산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점지 받을 수 있었다. 고려 말 왜구를 토벌한 공로가 섬사람들과 보광산의 산신령에게는 인정받은 것일까?


이성계는 보광산에 도착하여 삼불암 건너 절벽 아래 자리를 잡고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는 맞은편 큰 바위에 작은 바위 3개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산신령에게 기도했다.


“산신령이시여, 제가 중국까지 정벌하여 황제가 될 운명이라면 저 바위 3개가 모두 서게 해주시고, 제가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운명이라면 2개를 세워 주시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 지금처럼 살아가야 한다면 1개만 세워 주십시오. 만약 하나의 바위도 서지 않고 백일기도가 끝날 때까지 모두 저 모습대로 누워 있다면 저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촌로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렇게 작정하고 이성계는 보광산 산신령을 향해 백일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말 밤 그는 난음 정자나무 아래에서 행신의 말을 듣고 온 젊은이의 말을 듣고 최선을 다해 상을 차리고 정성껏 기도를 드린 후 산신령의 감응을 기다렸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이성계는 두 개의 바위가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고려의 왕이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도 금산 탑대(고제암)에서 보면 큰 바위 위에 하나는 누워 있고 두 개는 서 있는 바위를 볼 수 있다. 남해금산 38경 중 하나인 삼불암이 바로 이성계의 전설이 깃든 바위이다.


그는 보광산 산신령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이 왕이 되면 보광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산을 내려왔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국을 열어 왕에 등극하고 난 후, 기도 중에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보광산이던 산이름을 금산으로 고쳐 하사하였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와 남해금산에 관한 이야기에는 또 다른 것도 있다. 지금부터 육백여 년 전의 일이다. 이성계가 건국의 대업을 이루려고 전국 명산을 찾아 신단을 쌓고 기도를 드렸다. 지리산에 이르러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남해의 보광산을 찾아 산 위에 제단을 쌓고 기도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하에게 비몽사몽간에 신이 일렀다.


“기도하는 자의 옆구리에 우피가 걸려 있음은 심히 불량하도다.”


부하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아뢰었다. 이성계가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허리에 찬 열쇠 끈이 과연 우피로 되어 있는지라 멀리 버리고 의복을 단정히 하고 비오는 날이나 바람 부는 날이나 쉬지 않고 지성으로 백일기도를 드렸다.


백일이 지난 후 태조가 사흘밤을 계속하여 꿈을 하나씩 꾸었다. 첫째 꿈은 자기 몸에 몸둥이 세 개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고, 둘째 꿈은 자신의 몸둥이가 목 날아간 병의 형상이 되어 있는 것이었고, 셋째 꿈은 자신의 몸이 큰 가마솥에 들어 있는 꿈이었다. 꿈을 꾸고 난 뒤 이를 이상히 여긴 이성계는 해몽으로 유명한 노파를 찾아갔다. 그런데 마침 노파는 없고 노파의 딸만 있어서 딸에게 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딸이 꿈을 풀이하였다.


“몽둥이 세 개는 태형 세 대를 당할 징조요, 목 없는 병은 목 잘릴 형벌을 받을 징조요, 가마솥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을 징조입니다.”


이성계가 노하여 딸을 크게 꾸짖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그 노파를 만나게 되었다. 이성계가 노파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노파가 이렇게 풀이하였다.


“몽둥이 세 개를 진 것은 그 형상이 임금 왕(王)자이니 임금이 될 징조요, 목 없는 병은 사람들이 목 밑을 조심스럽게 다룰 것이니 만인이 받들 징조요, 가마솥 안에 들어간 것은 금성철벽(金城鐵壁)의 궁궐에 드실 징조입니다. 이 꿈은 다시 없는 길몽이니 앞날이 빛나시겠습니다.”


이성계는 노파의 비상한 해몽에 감동하여 돈 천냥을 주어 사례하고 산을 내려왔다. 그 후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한양을 서울로 정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이성계가 즉위한 후에 상벌을 밝히어 지리산은 전라도로 내치고 보광산은 비단으로 감싸 주려고 하였다. 이에 어떤 신하가 아뢰었다.


“비단으로 산을 감싸는 것은 국가의 재정을 흔들리게 할 뿐 아니라 일시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산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붙여 금산이라는 산명을 하사하심이 옳은 줄로 생각됩니다.”


이에 태조가 신하의 말을 옳다고 여겨, 보광산에 금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금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남해군 상주면)


출처 : 남해군지편찬위원회, 남해군지上, 씨티플랜, 2009, 829~830쪽. 경남농협, [97 경남 방문의 해] 경남 전설을 찾아서, 향토자료출판사, 1997,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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