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일)
호찌민의 우기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의 북부 수도 하노이에는 4계절이 있는 반면, 남부 경제수도라고 일컬어지는 호찌민에는 건기와 우기로 계절이 나뉜다.
건기는 11월에서 4월까지의 6개월, 우기는 5월에서 10월까지의 6개월이다.
건기 마지막 달인 4월과 우기 첫 달인 5월에는 체감 온도가 섭씨 40도를 넘어가는 잔인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대신, 12월에서 3월까지는 습도가 낮고 청량해 여행 최적기로 꼽힌다.
호찌민에서는 5월이 되면 아주 가끔씩 비가 오다가 6월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26년 전 호찌민에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만 해도, 본격적인 우기의 날씨는 분명했다.
오후 3시 전후로 30분가량 하늘이 뚫린 듯,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빗줄기가 쏟아진다.
도저히 달릴 수가 없으니, 오토바이들은 고가도로 밑이나 인도로 대피해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배수가 잘 안 되는 지역에서는 사이공강에서 역류한 강물로 도로가 잠기기도 했다. 판티엣에서 2 가족이 휴일을 즐기고 돌아온 날, 타오디엔 (Thao Dien) 상습 침수지역에 사는 후배 집으로 가다가, 마이크로버스가 물에 잠기어, 바짓가랑이를 걷고 아이들을 한 명씩 업고 내린 적도 있었다.
신기한 현상은, 그 짜릿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시원한 스콜이 지나간 뒤에는, 언제 비라도 왔냐는 듯 도로 위에는 빗방울 흔적 하나 없는 쾌청한 맑은 날씨로 바뀌는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후 변화로 인해 우기 때 비의 양상도 많이 변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비가 오기도 하고, 한 번이 아니라 수시로 내리기도 한다. 빗줄기도 많이 가늘어졌다. 예전의 스콜이 그리울 때가 많다.
우기에 비가 오고 나면 온 세상이 맑아진다.
기온이 내려가고, 매연도 내려앉고, 나무와 꽃들도 온전한 색깔을 되찾는다. 꽃들은 더 진한 향기를 내뿜고 새들을 더 맑은 목소리로 지저귄다. 사람들도 활기가 넘친다. 잔디밭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이름 모를 잡초들도 밤새 제 키만큼 더 자라난다. 우기만의 멋스러운 장면이다.
계절이 변하는 건기의 마지막 달인 4월이 되면, 사람들은 우기에 대한 향수를 상기하며 우기를 기다린다.
최근 가끔 창밖으로 들리는 밤비 소리를 대하면 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잠시 단잠을 깨운 그리웠던 빗소리는, 오히려 더 깊고 개운한 단잠을 자게 해 준다.
아침 산책 길에 나선다.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은 비 맞은 뒤 활짝 핀 노랑 아라치스 핀토이 (Arachis Pintoi)다.
보랏빛 루엘리아 (Ruellia)와 새하얀 재스민 (Jasmine)이 나를 반기자, 주황색 헬리코니아 (Heliconia) 무리도 손을 흔든다. 이에 질세라, 새빨간 익소라 차이넨시스 (Ixora Chinensis)도 고개를 내민다.
오늘따라 하얀 거미 백합, 히메노칼리스 (Hymenocallis)가 루엘리아와 다정하게 나란히 피어있다. 나는, 비 맞아 오솔길에 떨어져 있는, 앙증맞은 에리스리나(Erythrina) 꽃잎들에게도 제 몫을 다한 대견함에 격려를 보낸다. 상념 속에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비 맞고 성큼 자란 야자수 나무들이 가슴 활짝 펴고 존재감을 표하고 있다.
예전의 스콜까지는 아니더라도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비라도 내리면, 창밖의 빗줄기와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낭만의 주인공이 된다.
이 모든 것이 호찌민의 우기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도 스콜 같은 청량한 비가 내려, 모든 헛된 욕망과 거짓을 말끔히 씻어 내리고, 정의와 진실이 살아 숨 쉬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