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30일)
오늘은 남포동 구경에 나섰다.
학창 시절, 남포동은 부산의 최대 중심가였다. 남포동에는 늘 활력이 넘쳤다.
저녁과 주말이면 젊은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기에, 남포동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친구 1명 정도는 쉽게 만나곤 했다.
나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일상이 무료해질 때면 가끔 남포동과 주변 재래시장 구경을 나간다.
그곳에는 사람 냄새 듬뿍 나는 소박한 시민들의 풍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면 뭔가 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다.
남포동에 가면 둘러보는 우리 부부의 코스가 있다.
그 코스는 자갈치역 7번 출구 인근의 부산 BIFF 거리와 광장에서 시작된다.
BIFF 거리는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출범과 함께 만들어진 영화 거리이다.
매년 이곳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야제 행사로 세계 유명 영화인들의 핸드 프린팅과 눈꽃 점등 행사가 이루어진다.
BIFF 광장은 메가박스 부산극장과 롯데시네마 (대영점) 사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남포동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영화의 거리였는데, 1914년 ‘욱관’이란 영화상설관이 들어서고, 1924년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될 정도로 영화의 산실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이 일대에 20여 개 극장들이 밀집되어 있기도 했다고 한다.
BIFF 광장에서는 그곳의 명물, 씨앗 호떡 한 개를 맛보지 않고 지나치기가 힘들다.
씨앗 호떡에는 땅콩, 아몬드, 호두, 해바라기씨, 건포도, 깨, 호박씨 등 무려 7가지의 견과류가 들어간다.
그다음, 인근에 있는 18번 완당집, 매운 회국수로 정평이 난 할매집, 원산면옥, 창선동 가락국수 맛집 종각집이나 부평동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38년 전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했던 부산 예식장이 탈바꿈한 돈가스 집도 가끔 찾는 곳이다.
점심을 마치면, 대청동 방향으로 이어진 국제시장과 부평동 깡통시장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국제시장은 영화 '국제시장' 상영 이후 잘 알려진 재래시장으로 의류 중심의 만물시장이다.
국제시장의 큰 도로 맞은편에 위치한 시장이 부평깡통시장이다.
자갈치시장, 국제시장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3대 시장 중 하나인 부평깡통시장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최초이자 최대의 규모로 개설되었던 공설시장이었다.
‘깡통’ 시장이라는 이름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통조림 등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캔 제품들을 이곳에서 갖다 팔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국제시장보다는 부평깡통시장을 더 좋아하는데, 이곳에서는 청과. 채소, 육류, 수산물, 곡류, 반찬. 가공식품, 의류. 침구류, 잡화 등 다양한 품목들의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어 눈이 즐겁다.
특히, 부산 먹방의 성지답게 어묵 골목, 죽집 골목, 단팥 골목, 베이킹 골목, 국밥 골목, 족발 골목 등 먹거리 골목들이 조성되어 있어, 먹거리의 시작과 끝을 보여준다.
저녁 7시 반이 되면 이동식 미니 포차 수레들이 등장, 밤 12시까지 시장 중앙 통로를 따라 한 줄로 길게 불을 밝히는 명물 야시장도 열린다.
포차 수레에는 삼겹살 꼬치, 낙지 호롱, 타코야끼, 볶음 가락국수, 육전, 닭강정 등 메뉴도 다양하다.
외국인들이 직접 파는 포차들도 꽤 있는데, 터키 케밥, 인도네시아 미고랭, 베트남 짜조, 기타 일본과 필리핀 요리까지 맛볼 수 있다.
부평깡통시장에 들어서면 아내는,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초장동 집에서부터 개다리 골목을 지나 부평깡통시장으로 오던 길을 들뜬 표정으로 가리키기도 하고, 엄마와 들렀던 가게들도 하나하나 알려준다. 연륜이 더해져 더 이상은 예전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니지만, 추억을 소환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내의 눈망울에서 빛이 반짝거린다.
어린 시절 아내가 엄마와 왔었다고 하는 단팥죽 가게에 들어가서 단팥죽을 맛보았다.
그 순간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 뒤편에 있던 꼽추 아주머니 반찬가게에서 누나가 사 주던 단팥죽이 문득 생각났다. 그 시절, 처음 맛본 그 단팥죽 맛은 평생 잊을 수 없다.
명절 때 옷 한벌씩 사 입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옷도 한벌씩 산다. 이곳 의류 가게의 가성비는 최고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순간을 소환하는 시간은 엔도르핀이 샘솟는 순간이다.
부산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노인과 바다뿐인 도시라는 오명 속에 있지만, 시민 개개인의 저력으로 세계인이 즐겨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계속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부산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해변과 어촌 마을들, 산과 바다의 조화, K-Food, K-Movie, K-Fashion 등 K-Culture의 중심지로 갖추어야 할 고유의 콘텐츠와 잠재력이 충분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경기 침체 분위기 속에서도, 광복동, 자갈치를 아우르는 남포동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힘입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것 같아 다소 위안이 되었다.
올해는 부산에 오래 머물게 되면서, 보고 싶었던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 동기들과 부산과 서울에 있는 서클 동기들, 죽마고우, 군대 동기까지도 원 없이 만났던 한 해였던 것 같다.
11월의 끝자락인 만큼, 금년에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남은 날들도 멋지게 마무리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