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6일)
연말이 다가오면서, 오늘이 세 번째 망년회다.
오늘은 다양한 인생 궤적을 살아온 25명의 초등학교 동기들이 모였다.
해외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50여 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다.
금년에만 2차례 공식 동기 모임에 참석했지만,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는 아직 서먹한 기운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동기 모임은 대부분 가벼운 대화와 식사로 채워진다.
부산에서 꾸준히 만나온 친구들 간에는 굳이 말을 많이 섞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기에, 활발한 대화가 오가는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다소 조용한 편이다. 술잔이 오가지만, 억지로 권하는 법도 없으니 각자 편한 만큼 마신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말하기보다 듣는데 주력한다. 사람마다 걸어온 길이 다른 만큼, 그 안에서 배울 점을 찾기 위해서다.
한쪽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가 들려 그 자리로 다가갔다.
처음 보는 친구 두 명에게 밝게 인사하며 간단히 내 소개를 하자, 그들은 자신들을 소개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다.
순간, 학창 시절 주먹 좀 쓰던 친구들이 신학기 초에 서열을 가늠하듯 주고받던 날카로운 눈빛이 스쳤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경계심이 풀리자, 체격이 큰 친구는 타지에서 오랫동안 건설회사에 근무하다 몇 년 전 부산에 내려왔다고 했다. 아직은 동기들에게도 낯선 상태인 듯했다.
다른 한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면도칼을 지니고 다닌 친구라고 그가 소개했다.
조금은 어색한 마무리로 대화는 끊어졌고, 두 사람은 1차 식사 자리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들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왜 그들은 처음 보는 친구에게 그토록 경계심 어린 반응을 보였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의 반응에는 살아온 시간이 스며 있기 마련이다.
문득 나의 어린 시절 풍경이 떠올랐다.
나는 어린 시절, 동네 뒤편 넝마주이 형들이 모여 살던 인근에서 자랐다.
세상은 그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나에게 그들은 따뜻한 정과 인간미가 있는 동네 형들이었다.
그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을 신분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세상 누구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위치에 서 있든, 어떤 생각과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 만난 두 친구는 아마도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배워 왔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온 경험을 통해 ‘경계가 우선인 삶’을 익혔을지 모른다.
그 단순한 차이가 순간의 긴장과 어색함으로 나타났을 뿐, 그 이면에는 각자의 삶이 만들어낸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비로소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었고, 오히려 짧은 만남 속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다른 동기모임에서도 가끔 학창 시절 싸움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거나, 물질적 풍요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누구나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70을 앞둔 나이에도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여전히 남의 기준에 자신의 가치를 두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세월이 흘러 만나는 친구들은 각양각색의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남은 생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나에게 나름 의미가 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의 모습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채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옛 추억을 공유하게 하며, 같은 시대를 걸어온 친구들과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루의 삶 속에서 누군가를 통해 무언가 배우거나 느낀 점이 있다면, 그 만남은 큰 선물과도 같다.
바람이 있다면, 우리 친구들 간의 대화가,
기억 속에 고이 남은 아름다운 추억,
들어만 봐도 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건설적인 이야기들로 채워지면 좋겠다.
나에게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 몇 명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제 한 해를 차분히 정리하며, 가족과 더 많은 사랑을 나눌 때다.
그리고 사색과 독서를 즐기며, 가끔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도 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