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VIP가 방한한다.
우리 집에서 VIP는 뉴욕에 사는 딸이다.
미국에서 10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은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베트남과 한국을 방문한다.
베트남에는 우리 부부가, 한국에는 오빠가 살고 있으니, 딸이 한국을 방문하는 때가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하는 날이다.
금년에는 오빠가 약 열흘 전에 장가를 갔으니, 오빠 내외와 딸의 커플을 포함하여 6명의 가족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이는 의미 있는 자리다. 온전한 한 가족의 완성체 같은 느낌이 든다.
아내의 제의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만큼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장소에서 6명의 식구가 가족 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우리 부부는 오늘의 이산가족 행사 준비를 하느라 며칠을 분주하게 보냈다.
분주하다고는 하지만, 내 역할은 아내의 포터 역할이 대부분이다.
인근 재래시장을 따라다니며 맡은 바 임무를 묵묵히 수행한다.
허리를 좀 펴려고 하는 순간, 아내가 나에게 느닷없는 임무를 부여한다.
다섯 식구에게 전하는 손 편지를 작성하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임무였다.
어릴 때부터 가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엽서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딸에게서 영향을 받는 아내가 갑자기 엽서 생각을 떠 올린 것이다. 반기를 들기에는 이제 역부족인 나는, 별 도리없이 펜을 들었다. 그런 다음, 창가에 자리를 잡고, 평소 하고 싶은 마음속 이야기를 크리스마스 카드에 옮겨 본다.
컴퓨터나 핸드폰 자판에 익숙한 내가 펜을 들고 5개의 카드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려고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어진 임무가 힘들수록 끝냈을 때의 만족감은 비례하기에 정성을 담아 하얀 공간을 조금씩 메워간다.
아들과 딸은, 태어날 때부터 장모님 손에서 키워졌기에, 이런 가족 행사가 있을 때면 아쉬운 마음으로 작년 초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나 역시 불현듯 그런 마음이 들어, 크리스마스 카드를 적다 말고, 생각나는 마음을 짧은 시로 옮겨 보기도 한다.
아쉬움에 밴 그리움
이역만리 흩어진 가족의 재회
기다림 속 설레는 행복
나눌 수 없는 허전함이 한편으로 아려온다.
금쪽같이 키워 주신 손자와 손녀
보여 드리지 못한 짝꿍들
아쉬움은 진한 그리움 되어 밀려온다.
천상에서 보내실 흐뭇한 미소
보은의 마음은
늘
때 늦은 후회 뒤에야 그렇게 오는 것인지
딸한테서 호텔 체크 인을 마쳤다는 연락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딸과 예비 사위가 이산가족 상봉 행사 장소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얼른 로비로 내려가니, 딸이 화사한 미소로 내 품에 안긴다. 금년 7월에 뉴욕에서 만났던 예비 사위와도 포옹을 나눈다.
행사 장소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아내가 이들을 반갑게 맞는다.
연이어 아들 내외도 미소 띤 얼굴로 나타난다.
며느리인 멜리사가 준비해 온 크리스마스 장식물들로 식탁 한편을 진열하니 행사 분위기가 물씬 난다.
아내는 오늘 새벽까지 준비한 음식을 데우고, 접시에 옮기고, 테이블 세팅에 여념이 없다.
중국계 미국인인 예비사위, 프랑스인 며느리가 함께 하는 특별한 자리인 만큼 아내는 각별한 정성을 담았다.
킹크랩과 모둠회, 잡채와 갈비찜을 중심으로 한 한식과 샐러드, 치즈까지 곁들여진 식탁은 아일랜드 식탁에 단정히 차려졌고, 그 모습은 5성급 호텔 뷔페 레스토랑 못지 않은 듯했다.
식구들은 각자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머리 위에 장식하고, 뷔페식으로 음식을 접시에 담아 들고 자리에 앉는다.
아들이 준비해 온 샴페인을 터뜨리고, 잔을 채운다. 다 함께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고 잔을 비운다.
그리고, 얼마 전 아들이 남해 독일 마을에서 나를 위해 특별히 사온 독일 맥주를 나누어 맛본다.
예비 사위는 일본에서 사 온 하쿠슈 싱글 몰트 위스키로 온 더 락 잔을 만들어 분위기를 띄운다.
예비사위 찰스와 며느리 멜리사는 서로 처음 만났지만, 평소 가족 간 통화를 할 때 얼굴을 익힌 탓에 자연스럽게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외동으로 자란 찰스는 세 살 위인 아들을 형님으로 만난 것이 무척 기쁜 듯 싱글벙글한다.
식사와 술잔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내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카드가 아들 딸 커플에게 전달된다. 다소 시크 (Chic)한 편인 아들과 예비사위는 간단한 한 마디로 감사를 표하고, 감정 표현에 아낌없는 딸과 며느리는 코끝이 찡한 듯, 얼굴에 표정을 담아 고마움을 표한다.
처음 또는 오랜만에 만난 만큼, 준비해 온 선물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내는 아들과 예비사위, 그리고 나에게 후드 티를 건네며 미소 지었고, 아들은 넥타이와 슬리퍼로 마음을 전했다. 예비사위, 며느리, 딸도 각자의 방식으로 작은 선물을 꺼내 놓았다.
각자 정성이 담긴 선물을 준비했기에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정성이 오롯이 전해진다.
한 해 동안 수고한 서로에게 격려하고 성원을 보내는 마음들이 전해지는 밤이다.
오늘의 만남은 특별한 만남이자, 특별한 행사였지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어색함을 느낀 사람은 없다.
아들 커플과 딸 커플을 바라보면서, 우리 부부는 이들이 천생연분처럼 정말 잘 만난 커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비사위와 며느리 모두 심성이 곱고 가족 간의 우애가 깊다.
우리 딸은 내년에 멕시코 해안가에서 결혼을 할 예정이고, 아들은 내후년 프랑스에서 정식 결혼식을 할 예정이니, 우리 부부는 체력단련을 잘해야 될 것 같다.
흩어져 살기에 더 애틋한 우리 이산가족 모두는 올 한 해의 기쁨과 아쉬움을 마음에 담고, 내년에도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