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일, 금)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이었다.
4개월 비운 단독 주택은 우리 부부를 원망하는 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사흘간 숨 고르기를 하며 대청소를 하고 나니, 집도 세수를 갓 마친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듯했다.
사람이 어쩌다 한 번씩 보일 정도로 여전히 호젓한 우리 동네 아침 산책길은, 내가 베트남으로 돌아왔음을 실감케 해 준다.
이름 모를 새가 '꾸꾸꾸'하며 나를 반기고, 단지 한쪽 빈 집에서 자라는 닭들도 훌쩍 커 있었다.
조그만 잔디밭 공터와 산책길에 피어 있는 블루 트와이라잇 (Blue Twilight flower), 헬리코니아 (Heliconia), 루엘리아 (Ruellia)와 바우히니아 (Bauhinia)까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적이면서 다이내믹한 한국도 좋지만, 정적이면서 평화로운 이런 우리 동네 분위기가 나는 너무 좋다.
일주일 전 한국에서 예비 신랑과 함께 베트남 푸궉으로 여행을 떠났던 딸이 나흘 전 호찌민에 왔다.
예비 신랑은 푸궉에서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바로 돌아갔다.
딸은 어릴 때 자랐던 호찌민에서 일주일 정도 추억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우리 부부도 기꺼이 그 여행에 동행하기 위해 베트남 집에 먼저 와 있었다.
일주일 뒤면 우리 세 사람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기에, ‘호찌민 여행 동행’이란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1년 만에 멀리서 날아온 딸은 약 2주간 재택근무를 하면서 부산에서 오빠 부부와 엄빠랑 시간을 더 보낼 예정이다.
딸이 도착한 뒤로 모녀는 물 만난 고기처럼 호찌민을 안방처럼 휘젓고 다닌다.
재래시장에서 옷을 고르고 베트남 맛집을 찾는 일은 빠질 수 없는 일정이다.
가성비 높은 쇼핑과 음식 탐방은 모녀에게 익숙한 즐거움이다.
산과 바다가 없는 호찌민에 사는 외국인들은 사실 공휴일에도 특별히 갈 곳이 별로 없다.
시내에 휴식을 취할만한 공원도 별로 없고, 대학 캠퍼스 내 야외공간이나 잔디밭 마저도 없다.
이런 이유로 베트남에 사는 외국인들은 주말에 주로 골프장을 찾는다.
한국의 모 기업에서 소유한 우리 동네 인근 골프장은, 설립자의 유지에 따라 한국인 시니어들에게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주고 있다.
평소 골프를 하지 않는 아내도, 딸이 연례행사로 베트남을 방문할 때면 일정 중 하루는 초보인 딸과 함께 가족 골프 행사를 하곤 한다. 이번에도 우리는 VIP를 모시고 가족 골프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바레 (Barre) 강사 경력도 있는 딸은 아침마다 빠짐없이 짐 (Gym)으로 향한다.
다음 날 아침, 딸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엄빠의 동행 여부를 지켜본다.
결국 눈치에 못 이겨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함께 짐으로 향한다.
새해맞이 장식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힘들어도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면 하루가 한결 가볍다.
그날이 다사다난했던 격동의 한 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연말의 호찌민 시내 중심가는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특히 크리스마스 이브와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조용히 가족과 함께 집에서 지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기에, 세 식구는 모처럼 집에서 부족했던 휴식을 취한다.
자정을 넘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길 건너 집 마당에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한다.
베트남 이웃의 특이한 새해맞이 방식이다.
새해 첫날 아침, 창가 참새 둥지에 참새가 들락날락하자 딸이 나를 부른다.
무섭다고 욕실 창문도 닫고 블라인드도 좀 내려달라고 응석을 부린다.
오랜만에 보는 서른 넘은 딸의 그런 응석이 싫지 않다.
오전 11시 15분, 셔틀 보트를 타고 사이공 시내로 나간다.
고등학교 후배 부부가 떡국을 함께 먹자고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누군가를 대접하고, 또 대접받는 일만큼 감사한 일도 없다.
점심을 먹고 발 마사지도 받은 뒤, 새해 기분을 내며 루미큐브 (Rummikub) 게임도 해 본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미처 보내지 못한 신년 인사에 대한 답신을 보내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또 2026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붉은 말의 해, 병오년 (丙午年).
불 (丙) 과 말 (午)이 만나 에너지가 분출된다는 이 해에, 나는 어떤 일상으로 하루를 채워가야 할까?
결국 안분지족 (安分知足)의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