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7일)
다시 찾은 부산.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산책 겸 해운대 바닷가를 찾았다.
1년 내내 무더운 호찌민에서 26년을 살다 보니, 섭씨 1도의 겨울 날씨가 더 춥게 느껴진다.
해운대 백사장과 오륙도, 이기대가 바라다 보이는 카페에 앉았다.
블루베리 케이크와 커피 한 잔의 가벼운 아침 겸 점심을 앞에 두고 창문 너머의 평화로운 전경을 즐긴다.
작년 말, 대학 서클 (동아리)에서 좋아하고 따랐던 선배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축의금만 보냈더니, 형수님이 답례로 카톡을 통해서 스타벅스 기프트콘 선물을 보내왔다.
축의금 답례로 이런 선물을 처음으로 받아 보았는데, 참신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오늘 아침, 카페에서 그 서클 선배 부부가 보내 준 선물로 식사를 하다 보니, 그 선배와의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보다 2년 위의 선배는 늘 박력이 넘쳤다.
사내다운 포스 때문에 많은 후배들이 그 형을 따랐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서클 회장 출신답게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정기 모임이 끝나고 나면, 늘 앞장서서 후배들을 이끌고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토목과 출신인 그 형은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라는 말을 늘 강조했다.
한 해 중단되었던 '국제친선의 날' 행사도 그 형의 독려에 힘입어 내가 회장을 맡아 치를 수 있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로버트 풀검 (Robert Fulghum)의 저서가 연상되듯, 향후 사회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그 형한테서 배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시 그 형은 모든 이슈에 대해 박식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명쾌했다. 나는 그 형으로부터 호연지기를 배웠다.
부산의 국립대 대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해 대부분 용돈이 늘 부족했다.
파전 안주에 막걸리라도 한 잔 하다 보면 돈이 부족해 교재나 손목시계, 전자계산기 등을 맡기기가 일쑤였다.
그 시절, 후배들에게 수시로 술을 사 주었던 그 형이 매일 걸어서 학교를 다니며 차비를 모았다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모 회사의 서울 본사에 근무하던 내가 울산 공장에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주말에 부산에서 보고 싶었던 서클 회원들을 만났다.
평소 잘 만나지 못했던 한 고참 선배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 고참 선배는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는 내가 사는 술을 반드시 먹어야 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트집과 강권에 못 이겨, 형을 포함한 서클 회원들은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가불해 간 출장비를 한 푼도 안 남기고 술값으로 모두 써 버렸다. 거의 한 달 월급 정도되는 거액이었다.
늦은 밤, 나는 형 집으로 가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 울산 공장까지 가야 할 일이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인기척에 잠에서 깬 형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여러 번 접은 지폐들을 펴 나에게 건넸다.
‘늦기 전에 서둘러 택시 타고 울산으로 가’.
그 돈은 형이 자전거를 사기 위해 돼지 저금통에 소중히 모았던 돈이었다.
그 형 말 대로 ‘안 되는 일이 없었다’.
서클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 인근 강가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었다.
강물 위로 무언가가 둥둥 떠 내려가고 있었다.
형 보다 1년 후배인 신입 여학생이 지나가는 말처럼 혼잣말로 말했다.
‘어머 저게 뭐지?’
옆에서 그 말을 들은 형이 망설임 없이 강물로 띄어 들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별 것 아니야’.라고 말하며 손에 든 것을 보여준 형의 사내다운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고 당시 그녀가 누군가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여고 시절 3년 동안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수재 여학생이었다.
그 이후 여자 선배와 형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형은 부산의 건설 관련 회사에서, 여자 선배는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졸업 후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두 사람 간에 위기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형이 도움을 청해 왔다.
서울 언니 집으로 간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 선배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형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했다.
형의 잘못으로 발생한 갈등에 대해서는 진지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있고, 아직 사랑하는 마음만 확인된다면 인생을 확실히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졸업 후 처음 서울에서 여자 선배를 만난 나는 어렵사리 여자 선배의 진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소중한 정보를 입수한 형은 얼마 후 확신을 갖고 여자 선배를 다시 만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었다.
지금 형수가 그 여자 선배임은 물론이다.
형은 여전히 부산에서 토목. 건설 관련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 후배나 동료 중 쉬고 있는 사람은 무조건 데려다 쓰는 괴짜 형이다.
형의 말에 의하면, 누구나 데려다 자리에 앉혀 놓으면 자기 몫은 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특히 사정이 어려운 후배는 찾아서 취직을 시킨다.
대신 급여를 많이는 못 준다고 하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이 형이 졸업 후 서울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었더라면, 틀림없는 사장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형은 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든 맡기거나, 같이 하고 싶어 한다.
나는, 나이 들어 언젠가부터 그 형의 지시 아닌 지시에 분명하게 거절하기 시작했다.
자유인의 삶이 좋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 형이 좋아하는 술, 담배도 좀 줄였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박력과 열정이 넘치는 형 고유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형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