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7일)
아침 8시경 VIP로부터 업무가 끝났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눈을 좀 붙이겠다고 한다.
VIP는 미국에서 온 우리 딸이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중, 엄빠를 보러 온 딸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한다. 밤에 일을 하고 오전에 잠시 수면을 취한다.
나와 달리 부지런한 딸은, 오후에는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엄빠와 같이 재래시장 구경도 하고, 먹고 싶었던 한국 음식도 하나씩 맛보면서 to do list에 적힌 내용들을 하나씩 지워간다.
지난 며칠간은 다이소에서 벽지를 사다가 집안 일부의 벽지를 갈기도 했다.
벽지를 사 오더니 줄자로 점을 표시하고 가위로 슥슥 자르고 뒷면의 점착 필름을 떼어낸 뒤 압력을 가하면서 좌우 상하로 벽지를 붙이기 시작한다.
높은 천장과 모서리 부분에는 의자 위에서 발꿈치를 치켜들고 처리해 나간다.
큰 키를 못 만들어 주어 미안하다고 하면서 나는 묵묵히 보조 역할을 수행한다.
아들 부부가 오래된 벽지 대신 페인트를 칠해 주겠다고 1차로 기존 벽지를 모두 떼어 낸 상태로 마무리 공사를 앞둔 채 멈춰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아내는 대견한 딸과 집안일에 문외한인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나를 평가절하하는 눈치다.
나는 작년 연말부터 VIP인 딸을 수행하느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젊은 날, 회사 일로 VIP를 수행할 때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전혀 아닌데, 묘하게 이상한 형태로 자유로웠던 나의 일정이 통제되고 있다.
나는 딸이 방문할 때면, 별 역할 없는 신입사원처럼 마음만 바쁘고 까닭 모를 긴장 속 대기상태를 유지하며 아내의 지시만 기다린다.
사실 딸과 오롯이 일정을 공유하고 수행하는 역할은 아내 몫이다. 나는 곁다리로 붙어 다니면서 짐이나 들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가끔 나는, 딸 결혼식 때 착용할 혼주 양복과 구두를 선물 받는 생각지도 못한 횡재에 보조역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대신 결혼식 2분 스피치와 딸과 같이 출 댄스 연습의 숙제가 부담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어제 오후에는 아내의 혼주 드레스와 구두를 구입했다.
딸은 엄빠와 함께 하는 시간과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본인이 함께 한 자리에서 엄마의 드레스와 구두가 확정되자 딸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밤에는, 결혼식 당일에 있을 '딸과의 댄스' 프로그램을 위해 딸이 만든 안무와 음악에 맞추어 연습도 해 본다.
우리 가족은 모두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어도, 인터넷 덕분으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페이스톡으로 통화를 하기에 서로의 근황을 소상히 알고 지낸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대며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없이 귀한 시간이다. 훗날 그리워할 추억임에 틀림없다.
무한긍정 딸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로 인해 집안에 활기가 가득하다.
다가올 4월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행복한 순간이면 마음 한 구석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그리움이 있다. 떠나간 분들, 소중했던 분들이 문득 떠오른다.
키위주신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2주기가 되던 날, 아들 부부를 포함한 우리 다섯 식구는 아들이 간직한 할머니의 옛 사진을 화면에 띄워 보면서 소중한 우리의 추억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우리 부부가 35년 모셨던 장모님의 모습은 집안 곳곳에 남아 우리 식구들과 늘 함께 하고 있다.
마침 이 날은 아내의 생일도 겹치기에 촛불 켠 케이크 주위에 모여 축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장모님도 물론 함께였다.
이 또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딸과 아들 내외랑 함께 하는 시간은 매 순간, 베트남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는 신선한 추억거리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시간들.
너무 그리운 것은 보고 있어도, 함께 하고 있어도 그리운 법이다.
오늘 함께 하는 시간,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인해 느끼는 행복은 정작 각자 떠나고 난 뒤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