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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잡러지영 Nov 13. 2021

2. 퇴사

안정감에 대하여 (2)




서른하나를 목전에 둔 2020년 12월, 묵혀뒀던 불안감이 정신이 약한 틈을 비집고 올라왔다.


몸에 고였던 안 좋은 것들을 떼어 낸 후였다.

처음 해보는 큰 수술이었고, 전신마취 동의서를 포함한 온갖 종이에 서명하면서 지난날들을 주욱 돌아보았다.


이렇게 일에 묻혀서 열심히만 살다가, 병원만 다니다가 그렇게 혼자 죽는 건 아닐까?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크고 작은 수술, 치료도 잦았고, 서울에 있는 큰 응급실엔 한 번씩 다 실려가 봤다. 응급실에는 갑작스러운 사고들과 죽음이 혼재해있다. 그런 혼란을 자주 목도하다 보니 삶이 불안정하게 느껴졌고, 늘 신기루 같은 안정을 좇았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서른까지만해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서른이 지나고 서른 하나가 다가오니까, 주변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왔다.


너 그러다 진짜 혼자 살려고 그래? 자리 잡아야지. 지금 아니면 기회 없다? 걔는 연하라서 너랑 끝나도 기회가 있지만 너는 연상이야 등등..

(물론 내가 잘되길 바라서겠지만) 얄궂은 말들이 나의 마음을 벅벅 긁었다.


나도 알지 이 사람들아. 누군 몰라서 그러나.

결혼은 그냥 하니? 뭐 준비된 게 있어야 하지.



아무리 단단한 벽이라도 같은 진동으로 계속 쳐대면, 그리고 그 반복된 진동이 벽이 가진 주파수와 맞아떨어지면, 금이 가는 건 순식간이다. 게다가 몸이 아플 때 사람의 약한 점은 더 약해지기 마련이다. 굳세게 틀어막고 있던 귀에도 틈이 생겼다. 그 시기 머리도 마음도 자주 흐트러졌다.



그러면 나는 왜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가? 남자 친구는 기간제 베프라는 말이 있듯,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게 겁이났다. 기간제 베프가 아니라 평생 베프가 되길 바랐다. 살면서 지지고 볶고 사네 못 사네 하더라도 말이다. 추상적인, 따뜻한 집. 가정이라고 부르는 그 집을 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추상적인 집을 가지기 위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야 했다.


그러면 벌고 모으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문제는 당시에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는 것이었다.쉬어야 할 타이밍이긴 한데, 쉬자니 무서웠다. 안그래도 늦게 일을 시작했는데 거기다 퇴사를 하면 안정은 더 먼 얘기가 될 거고, 불안은 더 커질 테니까.게다가 지금의 경력으로 그만두면, 그리고 그 상태로 나이만 들면 나를 받아줄 회사가 없을 것만 같았다.



스무살 이후로 변화의 시기마다 안정감을 주는 객체는 달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대학원생이라는 소속감이 안정을 줬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직장이 안정감을 줬다. 정확하게는 매달 10일에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이었지만, 어쨌든 이십 대 끝무렵에는 직장(=월급)이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결혼이라고 믿었다. 미루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던가.


한참 이야기를 듣던 (지금은 예전 연인인) 그가 말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나는 답했다. 사회는 나를 나이로 판단할 거라고.

그랬더니 그가 다시 말했다. 지금이 남은 날 중에 제일 젊은 때라고. 그러니 더 늦기전에 지금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면서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명언 모음집 뒤지면 꼭 있을만한, 정말 하나도 새로울 것 없던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지금이 남은 날 중에 제일 젊을 때’라는 게 힘이 되었다. 맞아, 나이가 뭐가 중요해. 어른인 내가 할 수 없는 건 ‘아역배우’뿐이라지 않던가.





그렇게 그 이듬해인 2021년 2월,

불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고

목표보다 조금 이르게 회사를 그만뒀다.


그게 프리랜스 N잡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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