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의 종말'은, 피로사회로 유명한 철학자 한병철의 책이다. 일단 책 두께가 얇고, 작가 네임벨류도 있다. 게다가 가격대도 부담이 없다. 일단 사람들이 선호할만한 요소는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공대생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고 주는 메시지가 명확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게다가 에세이 형식이라 막힘없이 술술 읽혔기 때문에 그래서 딱히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이다.
그는 안정과 공감을 담당하던 상징과 의식의 효용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자본과 효율성이라는 물적인 잣대로 판가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투표로 선정된 책이라 룰에 따라 그에 대한 글을 써야 해서 책에서 쓸만한 문장을 추려보았는데 딱히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밑그림이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막힘없이 술술 익히는 책에는 내 생각을 담을만한 여지를 발견하기 어려웠고, 억지로 써봤자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감상을 표현하는 수준밖에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문작가가 아니므로 스스로 창조성을 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책을 선정할 때도 고전과 철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문체가 추상적이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하는 만큼 해석의 여지가 늘어나고 내용을 확장하고 변형하기에도 수월하다.
나는 읽는 책에서 모티브를 찾고 싶은 것이지, 그 안에서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글쓰기가 막막할 때마다 시도하는 나름의 리추얼이 있다. 바로 미술관에 가는 것이다.
필자는 마틴 게이퍼드라는 미술평론가가 쓴 '예술과 풍경'이라는 책을 손에 끼고 지하철에 앉았다.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설명하기보다 작품이 있는 장소를 방문하거나 그것을 만든 미술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이 가진 상징성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작가는 가상의 경험보다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실제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고 풍요로운 경험이라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미술가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는 관람객 또한 작품의 주체이다. 따라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노력을 들여야 하고 그 여정에 들여간 시간까지도 입장료에 포함된다. 먼 곳까지 간 만큼 더 오래도록 작품을 감상해야 하며 미술관을 한 바퀴 휙 도는 것은 책을 읽지 않고 휙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나는 리추얼이라는 단어에서 고미술을 떠올렸고. 망설임 없이 한강진역 근처에 있는 리움미술관으로 향했다.
다른 전시장과 다르게 리움에서는 건물의 형태와 작품의 배치를 이용하여 특별한 지시 없이도 관객이 고미술에 대한 콘셉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건물의 어두운 외관을 통해 고미술 감상에 어울리는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건물의 곡선 형태를 따라 전시품을 배치하여 유물을 하나씩 순차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유도하였다. 이곳은 예약제로 관람객을 받기 때문에 급하게 둘러볼 이유도 없고, 비치된 스마트 가이드로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QR코드를 찍을 필요도 없고 그냥 작품 앞에 가까이 가면 센서가 감지하여 관련된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조명은 작품의 아우라를 더욱 부각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시간은 이러한 공간 속에서 숨죽이고 멈추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종교인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작품에 귀 기울이고 깨달음을 구했다.
빛은 작품이 가진 아우라를 더하여준다.
다음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화이트 톤의 나선형 계단을 하나씩 발로 밟으며 내려갔다. 계단의 벽 쪽에 붙어있는 오색 창들은 빛을 머금어 아름다운 색채를 연출하였고, 나는 고개를 들어 채광창에서 쏟아지는 빛의 향연을 만끽하였다. 이러한 의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 후 남아있는 테마를 찾아 떠났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경건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리움에서의 관람을 마친 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서촌 그라운드시소에서 진행 중인 <레드룸 : 러브 이즈 인 디 에어> 전시를 보러 갔다. 이 전시회는 국내 최초로 사랑, 연애. 결혼에 다루는 대형 전시라고 한다. 사랑할 때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크고 작은 원동력이 된다는 문구를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고 있으나 정보를 검색해보니 섹스에 대한 작가들의 감상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리움과 완전히 대조되는 분위기를 가진 장소에서, 리추얼이 제거되었을 경우어떤 기분이 들것인지 경험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렇게 노골적인 콘셉트로 진행되는 전시에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오는 시람이 있었다. 특히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커플들이 많았고 나처럼 혼자서 방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도 나름의 리추얼이 있었는데, 한번 섹션을 지나가면 중복 관람이 안되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회전율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빨리 보고 나가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리움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대략적인 감상평으로 이야기하자면 특별한 것이 별로 없었다. 작품들은 사진이나 실크스크린 등, 주변에서 복제 가능한 것들로 구성되어있었고 보이는 것은 그저 이미지밖에 없었다.
민초 킹의 작품은 설렘과 만남 그리고 기다림과 망설임처럼 사랑에 이르는 과정을 전희와 삽입, 절정과 후희라는 섹스의 단계로 대체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사랑은 극단적 소비사회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이런 식의 발상을 통해 가식을 걷어낸 사랑의 형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초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결과물이지, 섹스가 곧 사랑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랑의 범주를 너무 좁게 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사랑은 관념인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인가?
리추얼이 사라진, 기표가 사라지고 기의만 남은 사랑은 캐치 프레이즈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것으로는 도무지 볼 수가 없었고, 그냥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책의 한 대목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포르노는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기조라고 할 수 있다. 생산 강제 아래에서 모든 것은 앞으로 끌어내어지고 전시된다. 모든 것이 무자비한 투명성의 빛 아래에 놓인다. 소통이 투명해지면 매끄럽게 연마돼서 신속한 정보교환이 되면 소통은 포르노적이 된다. 언어가 놀이하지 않으면 오직 정보만 운반하면 언어는 포르노적이 된다. 몸이 연출적 성격을 완전히 잃고 오로지 기능만 해야 하면 몸은 포르노적이 된다. 포르노적인 몸은 어떤 상징성도 없다.'
하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먼저 우리 안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실용만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형식만을 강조하는 것 또한 사물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나는 미술을 감상할 때 뭔가 납득할 수 있는 개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워홀과 뒤샹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키치적인 발상을 통해, 형식에만 치우친 이데아의 개념을 붕괴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의 파괴에만 축이 기운다면 여느 진부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럴 때 미술은 또다시 개념을 제시해야 되는데, 그것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새롭게 재창조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미술의 본질은 그 자체에 파괴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창조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술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리추얼'의 형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전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 감정의 물성, 김초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