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서 가장 멋진 것, 제일 좋은 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키와 피츠제럴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불현듯 생각나면 나는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 그 부분을 집중해서 읽곤 했는데,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페이지도 재미없는 페이지도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멋질 수가 있을까 감탄했다.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멋진 소설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본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읽어 보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인간조차 없었다. 1968년에 스콧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것은 반동으로 지목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장려할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예전에 얇은 책으로 읽었던 적이 있었지만 막장 로맨스라는 느낌 이외에 특별한 인상이 느껴지진 않았었다. 그러나 하루키의 극찬을 읽고 난 후,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에게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가장 번역이 잘되어 있다는 민음사 판본을 구해서 다시 읽게 되었다.
개츠비와 와타나베
개츠비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관련된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개츠비는 우연히 주인공 닉 캐러웨이의 옆집에 이사를 오게 되는데, 닉의 사촌 데이지를 사모하여 우연을 가장하여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개츠비의 집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속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그가 사랑하는 데이지도 그렇다. 사실 개츠비는 자신의 성공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면서, 과거를 속여 가며 신분세탁까지 한 인물이었지만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게는 부와 명예조차도 사랑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닉은 그런 개츠비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데이지는 돈만 밝히는 속물이었을망정 개츠비에게만큼은 존재 그 이상이었다. 그녀와 남은 삶을 할 수 있다면 지나간 모든 과오들을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었다. 개츠비는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데이지의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그녀의 남편인 톰 뷰케넌의 계략에 의해 목숨까지 잃게 된다. 비록 개츠비의 삶은 도덕적으로 타락했을지 몰라도 자신의 사랑 앞에서는 그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했다. 그러고 보니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개츠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타나베 또한 개츠비의 이상과 사랑에 대해 공감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닉처럼 관찰자의 시점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서사에도 깊이 개입하는 인물이다. 사랑은 개츠비에게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이자 주장할 수 있는 권리의 근거였다면, 와타나베에게는 그것은 죽은 친구의 애인에 대한 의무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속에서 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그녀에 대한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기억 속 깊은 곳에다 봉인한 채로 살아간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나오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물들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머물러 있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유일하게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현실적이고 생활력이 강한 미도리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면서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회상과 함께 시작되는 그의 모습은 뭔가 건조하게 보이고, 중요한 어떤 것을 잃은 사람처럼 묘사된다.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나오코'와 관련된 추억이었다. 주인공은 비행기 속에서 그녀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꺼내놓으면서, 갈등과 방황 속에서 괴로웠던 기억을 소환하게 된다.
개츠비 역시 데이지에 대한 추억과 그녀에 대한 환상에 매여 있었으나 와타나베와 달리 현실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하나씩 실현해 나갔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만이 그의 삶의 방향이자 목적이었고,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빛이었다.
카페 소사이어티
나는 얼마 전에 '위대한 개츠비'를 오마주해서 만들었다는 우디 엘런 감독의 '카페 소사이어티'라는 영화를 봤다. 스토리라인도 훌륭했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끔찍한 블랙코미디나 말도 안 되는 막장 드라마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장면들을 재즈음악을 삽입하여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오로지 성공만을 향해 달려온 남자와, 동경하던 삶을 위해 그의 곁을 떠났던 여자는 이상적인 조건들을 갖추게 된 후 다시 만나게 되지만, 함께하기에는 그들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결국 그들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었던 사랑을 뒤로한 채로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연말 파티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하고 행운을 빌어준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그녀가, 그녀의 곁에는 그가 없다. 그렇게 영화는 흥겨운 재즈음악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인생이란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은 재즈가 한창 유행하였던 시기였고, 작품 구석구석에 그러한 느낌을 주는 대목들이 보인다. 개츠비의 삶은 재즈음악 그 자체이다. 비록 즉흥적인 것일지라도 특유의 리듬감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서사를 전개해 나간다. 심지어 그런 과정에 불협화음이 섞여있을지라도 멜로디와 어우러지며 주제를 완성해 나간다.
재즈음악의 매력은 바로 즉흥성과 비정형성이다. 그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사랑과 미움, 만남과 이별도 있고, 비록 의도한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갈지라도 나름의 멜로디와 리듬을 가지고 있다. 클래식처럼 형식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특별한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상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몸이 느끼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그렇게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치게 복잡한 코드를 자신에게 부여하고,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음악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깊은 밤, 잠은 안 오고, 창밖에 떨어지고 있는 빗소리를 리듬 삼아, 재즈와 함께 떠오르는 상념들을 끼적여본다.
♧ 참고자료
<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민음사, 2009.01.20. >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족속이요. 당신 한 사람이 그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