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사람들과 청담 동에 있는 루이뷔통 명품관에서 열리는 '자코메티' 전시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같은 루이뷔통 매장이라도 명품관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백화점에서 느꼈던 그것과 비교할 수없을 만큼 강렬했다. 지인들과의 가벼운 방문이었지만, 나는 매장의 입구에서부터 압도되어 버렸다.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은 살아서 자기 고유의 색을 발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응대하는 직원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5층에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만화경처럼 여러 각도의 거울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비춰주어, 마치 겨울왕국에 들어온 것 같았다. 건물과 제품들, 분위기 등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과 그것들을 통해 내면에서 느껴지는 것들,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루었다. 촌스러움을 뒤로하고 미술관에 도착해서 작품을 감상하던 중, 문득 실존주의와 루이뷔통의 이미지는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실존주의란 합리주의적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말하는데, 허무와 반복 속에서의 자기를 부정하고 주체로서의 삶을 자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일반적인 조각은 틀과 형태를 만들고 붙여가면서 이미지를 구축 해나가지만 자코메티는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가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에게 최고의 삶이란 가볍게 사는 것으로서, 그것을 최대한 덜어내어 고통스럽고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자코메티는 구도적인 삶을 지향했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완성된 형태를 해체하여, 삶이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 개념은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완벽하게 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제품에는 작가의 혼이 담긴 아우라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우라란 예술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상하고 독특한 분위기 또는 품위나 품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루이뷔통의 제품들은 다양한 제품군으로 구성되어 있을지라도 기성품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복제 가능하다. 개별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와 자본주의 하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성품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루이뷔통은 기성품 중에서도 명품 군에 속하는데, 이러한 명품들은 일반 제품들과 다른 위치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비록 기성품일지라도 다른 것과 대체 불가하다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상품들은 같은 복제품이라도 나름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미술전을 유치함으로써, 루이뷔통은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브랜드이며, 자사의 제품을 소유하는 것은 곧 실존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왠지 논리적 비약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자본은 개념상 양립 불가한 것으로 생각되는 영역과 문맥적으로 연결이 어색한 부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여,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를 아름답고 바람직한 것으로 포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키치와 데페이즈망의 차이
'키치'란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을 뜻한다. 움베르트 에코는 키치를 구조적인 용어로써 문맥을 벗어난 양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키치는 독창적인 구조의 필요성이나 동질성과 일치하는 특성들을 지니지 못한다. 반면에 '데페이즈망'은 '정든 고향을 떠나다.'라는 뜻으로 익숙한 사물이나 대상에 부적절한 삽입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기법을 말한다. 필자는 현대미술에서 사용되는 키치와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으로 나름의 관점으로 계몽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보통 계몽이라고 하면, 구습이나 절대적 이념에 사로잡혀 무지몽매한 상태에 빠진 인류를 '이성의 빛'으로 몰아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정신적인 삶을 만끽하며, 좀 더 과학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교양적인 이상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18세기에 시작하여 구태의연한 사회와 종교, 그중 비과학적인 생각으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했으며, 공평한 사회의 실현을 꾀했다. 즉 과학적, 합리적 사고가 확산된다면 사회는 진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진보, 경제의 발전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격차와 주체 상실에 의한 문제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왜 인간을 더욱 높은 단계에 올려놓고자 했던 계몽주의는 그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일까? 일단, 계몽주의는 그것을 주창한 인물부터 그 의도와 맞지 않는 모순들을 보여주고 있다.
토머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국가권력을 통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제를 통한 독재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군주의 이익은 곧 신민들의 이익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계약으로서 군주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넘기면 민주주의의 폐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군주제에서도 아노미 현상은 여전히 발생했고, 신민의 이해관계가 국정운영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모순이 있다.
존 로크는 본래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공동자산이 된다고 했고, 거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지면 그것은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노동의 생산물을 사유재산에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토지까지도 사유재산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로크의 이론대로라면 사유재산의 소유자가 겹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익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만약 토지 소유자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빌려주는 대가로 토지의 수확물을 소유하게 된다면, 토지 경작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므로, 이는 자연에 자신의 노동을 가했을 때, 그 결과물은 노동한 자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로크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장 자크 루소는 계몽주의자였으나, 반계몽주의자 이기도 했는데, 그는 인간을 이전의 사회보다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각종 문명과 사회규범은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은 문명 이전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 문명 이전의 세상이 이상적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현실은 루소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가혹한 것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어보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동질성과 친밀성이 공유되는 쪽에는 협력을 하지만, 자신들과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서술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오히려 문명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언어와 규범이 만들어지면서 다른 종족이나 민족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어느 정도 안정과 평화가 정착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이러한 계몽주의로부터 파생된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부르짖으면서 시작되었고 부르주아들은 민중들과 합세하여 그들을 억압하던 전제정권들을 몰아내었다. 그런데 혁명의 이상과는 달리, 목표가 달성되자 부르주아들은 구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민중들도 조건이 된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전보다 나은 지위를 성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과 신진세력 간에는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한 아노미 사태가 나타나게 되면서 해결사로 자임하는 이들이 나타나 권력을 잡아왔다. 이러한 현상은 이름만 달리할 뿐 그 맥락을 연결하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인권운동에서도 반복되는 레퍼토리였고, 극단적인 이론들이 계몽 그 자체를 변질시키고 파괴하였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사회적 경제영역과 개인적 문화 영역 사이에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이성은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 선악 또는 미추를 식별하는 능력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 그 자체에 도달하는데 만 중점을 두다 보면, 역사는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가 발전하고 연결될수록 진보적인 결과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4차 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퇴보되는 모습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계몽이라는 이상 위에 맥락에 맞지 않는 의도들이 삽입되면서 변종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하나의 사건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요소들과 혼합되어 진위가 밝혀지기는커녕 더 혼란을 가중시키고 왜곡을 야기했다.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아도르노는 계몽에는 퇴보의 가능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계몽주의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는 경우도 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내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내놓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민족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으로 해석되었다. 사실, 3.1 운동 또한 민족대표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그들은 탑골공원에 가지도 않았고, 경찰서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후 체포되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다 지쳤던, 열정이 가득한 풋내기 전도사 한 명이 단상에 올라 기미독립선언문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함으로써 독립운동의 포문을 열어버렸다. 이러한 혁명에 감명을 받았던 인도의 위대한 시인은 `기탄찰리`에서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찬미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흑인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싸움이었다. 북부는 공업시설이 발전했고, 남부는 목화 재배가 유명하였다. 북부는 공장의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흑인을 교육시켜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남부에서는 북부에서 그러한 일이 생기게 되면 대규모 농장에서 흑인 인력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다. 이렇게 남북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던 유럽 강대국들은 남부를 지원하여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를 원했다. 이에 위협을 느꼈던 링컨은 전략적 의도를 가지고, 노예해방이라는 전쟁의 명분에다가 정의와 인류애라는 가치를 덧붙여 선포해 버렸다. 졸지에 유럽 강대국들은 인류의 대의에 맞서 싸우는 형국이 돼버렸기 때문에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포기했고, 공산주의 진영에 있는 마르크스도 남북전쟁은 내전을 넘어선 혁명 전 교전이라며 크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북부의 승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필자가 같은 맥락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바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이다. 그는 연예인으로서 <국민의 일꾼>이라는 시트콤에서 역사 교사 출신으로,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청렴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코미디에서 끝나지 않고, 시트콤의 출연진들이 동명의 정당을 창당하면서 그 또한 대선에 출마하여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정치경력이 전무하였으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두려움 없이 러시아에 맞서 인류의 양심에 호소했고, 세계의 지지를 얻어 졸지에 대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이 되어버렸다. 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우크라이나가 물자 부족과 각국들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전쟁에서 밀리고 있지만, 인류의 대의라는 명분 앞에서 강대국들이 젤렌스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상 특기할만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또 이 사태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매개체로 비판을 받아왔던 SNS와 유튜브 같은 매체가, 뉴스보다 더 생동감 있고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뉴스에서 간과해 왔던 영역들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국제적인 관행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 이론은 이러한 종류의 사례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데, 역사의 발전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모순되는 과정이 하나의 결과로 개념화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역사의 일반성을 뛰어넘는 가능성이 발현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것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으며, 다만 역사의 평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데페이즈망'으로 용어로 표현하고 싶다.
계몽의 목적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편견들을 진리라고 믿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러한 세계가 조각처럼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고, 쪼개지는 균열 사이로 보이는 모순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는 한 사물의 한 단면에만 천착하는 것은 전체적인 모습을 왜곡하여 폭력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즉 권력이란 그 시대의 지식을 독점하는 것으로, 시선을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계몽 또한 권력의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더라도, 견제받지 않은 채로 권력화 되는 경우에는 그것이 추구하는 이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오히려 계몽은 그 이상과 대립되는 가치들 사이에서 그 자체의 순수성이 존재하며, 갈등하고 부딪칠 때 내포되어 있는 근본정신이 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은 계몽뿐만 아니라 하위 개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계몽의 본질이며, 그것은 계몽을 각성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체를 부분으로 격하시키거나, 부분을 전체로써 일반화시켜서도 안 되며,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온전한 주체로써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계몽의 목적이며, 또한 존재의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 개념의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호크하이머, 문학과 지성사, 2001.08. >
< 철학용어 도감, 다나카 마사토, 성인당, 2019. 4. >
<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 메이트 북스, 2018.02. >
기타, 나무 위키 참조
늙는다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퍼지는 자연스럽지만 위험한 질병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결함에 대비하고 최소한 그 진척을 늦추기 위해 각별히 주의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