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어떠한 외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고, 우리의 사상이나 감정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을 자유로 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야말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의 개체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또한 외적 권위로부터의 자유는 내부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가 자기의 개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항구적인 성과가 된다.
'레미제라블'과 '두 도시 이야기'
프랑스혁명은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성과 양심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를 형제애로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혁명의 정신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레미제라블이라는 단어는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 작품은 '장발장'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레미제라블'에서는 사회에서 무시받아온 사람들이 그들을 압제해 온 권력의 부당함을 의식하게 되고, 자유를 위해 싸워나가며, 다가올 혁명의 시대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는 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제삼자의 입장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혁명의 성공에 도취된 이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그들의 지배계층을 처형하기 시작했는데, 법과 절차에 따랐기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서 형을 집행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았던 공화주의자들이 이성에 근거한 계몽을 표방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들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원한을 달래기에는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소설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삼촌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위하여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음을 선택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프랑스는 급진파를 필두로 하여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들 사이에서 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사회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은 지배와 복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형제애를 표방하는 박애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수단으로 격하되었다. 혁명을 달성하였던 프랑스인들은 왜 다시 권력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을까?
자유와 복종
자유는 이성과 양심이 전제되어야 하며, 혁명에 이러한 가치가 덧입혀졌을 때, 사람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신성한 사명을 받아들였고, 자유의 여신은 그들과 함께하였다. 혁명의 정신은 자유 프랑스를 전복시키는 전제국가들의 시도들을 무마시킬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지만 혁명이 달성된 후 자유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의 적이 사라졌을 때의 승리감은 잠시였고, 그 공백만큼의 불안감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획책하려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그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지난날의 고통과 압제는 그리운 미덕으로 기억되었다. 결국 자유의 여신은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를 신랑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가 추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시민계급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동질감을 얻을 수 있었고, 누구나 노력하면 그러한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른 찬탈자들처럼 자신이 황제임을 선포하였고, 시민 역시 계층에 따라 신분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독재는 힘이 집중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든 아니면 타의적이든 그것이 어딘가로 발현될 수밖에 없으며,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권력은 스스로 충돌을 야기하여 붕괴를 촉진할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를 하기 위해서는 친구보다적이 필요하다. 나폴레옹의 꿈은 혁명의 정신이 고취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시작은 선의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약탈이 수반되어야 했고, 무리한 힘의 팽창은 자신의 몰락뿐만 아니라 국가의 붕괴까지도 초래하였다.독일의 경우도 이와 유사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그의 꿈과 이상은 독일인들의 긍지가 되었다. 그는 대중연설의 탁월한 힘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청중의 의지를 장악하는 것이 선전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지적하기보다는 그러한 원인을 공산주의자들과 유태인에게 돌렸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환심을 얻기 위하여 그들로부터 재산과 일자리를 빼앗아 국민들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복종의 달콤함은 얼마 가지 않았고 독일은 자유를 희생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자유와 도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체주의와 독재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세계는 평화와 안정을 이루면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중시되었다. 현대인은 이전보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추구하며, 원하지 않는 것을 거부할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권리들이 만연해지고 서로 충돌하게 되면서, 지나친 개인주의 때문에 전체주의가 야기했던 만큼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예전에는 숭고한 이상이 변질되면서 그러한 문제가 생겼다면, 지금은 이기주의가 자유란 이름을 표방하면서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극단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유란 미덕으로 인간의 욕망을 더욱 부추기고, 공동체에 대한 기여보다는 소비의 능력에 따라 인간성을 평가하고 있다. 즉 인간성은 소비의 질에 따라 평가되고, 이에 편승할 수 없는 사람은 그에 대한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보다는 조건과 조건을 이어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버렸다.이전처럼 시스템은 사람들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언론과 매스컴들은 시대가 바라는 기준과 이상향을 선전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스스로 학습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그들은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설정해 놓은 알고리즘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빅데이터로 수렴되어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줄 것이다.
선택의 대가
동물에게는 본능적인 패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일관된 삶을 산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고, 주변의 환경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과 환경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고가 깨어나고 문명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독립의 시기는 더욱더 늦춰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문명의 발전과 비례하여 욕망의 크기도 커져가기 때문이다. 가면 갈수록 취업과 결혼의 준비는 어려워지고, 그러한 범주에 들 수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성취한 이들을 부러워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립시키고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는 불복종의 행위로 인해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아담의 불복종을 '원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금지된 명령 속에는 신의 섭리가 숨어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금지된 것에 강하게 유혹을 느끼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응석받이인 채 낙원에 머물러있는 아담을 안타깝게 생각했고, 진심으로 그가 성장하기를 바랐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낙원으로 케루빔을 보내 불칼을 들도록 하여 자신의 피조물의 접근을 막고 스스로 세계를 창조하도록 하였다.이러한 맥락은 출애굽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압제와 복종을 넘어 스스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광야로 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광야란 단어는 황량한 느낌이 담겨있지만, 사실 성경에서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어떤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을 때, 그 앞에 서서 막연히 쳐다만 보고, 누군가가 대신 그것을 해결해 주길 바라거나, 시도해보지도 않고 그저 정신승리로 만족하는 사람은 방향을 돌려 다른 쪽을 알아본다고 해도, 항상 같은 지점에서 같은 고민에 머물러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모든 것을 걸고 부딪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성공, 실패와 상관없이 자신의 한계를 알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의 장애물을 뛰어넘게 될 확률이 높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활기가 넘치며, 스스로를 창조하는 자로서 우리는 장르와 상관없이 그를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을 가지는 데, 하나는 사물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마음과 감각에 의하여 떠오르는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표현함 또는 그런 형태를 말한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만일 그렇다면 모두가 신의 형태를 가짐과 동시에 그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다. 프랑스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는 이러한 천부인권 사상에서 파생되었고, 이러한 가치에는 신의 속성인 이성과 양심이 전제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기본형 태를 이루기도 하며, 개인에게는 '자기애'로 불리고, 이러한 사랑이 확장되어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과 일치 속에서 더 큰 사랑인 '형제애'로 귀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이성과 양심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을 핵심으로 하며, '자기애'와 '형제애'의 차이는 차별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리에는 의무가 수반되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든 자유이든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분리와 고통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주체성이 바탕이 될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천국인가? 삶인가? 무엇이 정답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모든 것은 선택이고 운명이며, 흐름에 따라 분수대로 살아갈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택한 것이 자유든 도피이든 우리는 그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치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참고문헌
<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휴머니스트, 2020.09. >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2020.09. >
<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다산초당, 2021.01. >
< 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민음사, 2012.11. >
<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5.03. >
나는 눈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귀가 있기 때문에 듣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뇌가 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그리고 나는 심장이 있기 때문에 느끼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내겐 인간과 세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