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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Jan 28. 2023

인간, 우주 그리고 코스모스 2

#인간현상, #드 샤르댕, #오메가포인트, #우크라이나

* 우리가 얼마나 창조자인지, 우리 영혼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에 관여하는지를, 우리들 안에서 그리고 자연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똑같은 불가분의 신성이다. 바깥 세계가 몰락한다 하여도 우리들 중 하나는, 그 세계를 다시 세울 능력이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자국 영토를 위협한다는 이유였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요구에 순응했다면 침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굴종보다 자유를 택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시큰둥했던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인들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 후 합심하여 힘을 보태고 있다. 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강한 울림을 주었고 세계는 이에 반응했다.     

  코로나라는 재앙을 겪으면서 세계는 이전과 달라지는 듯싶었으나, 아주 잠시 뿐이었다. 조금 완화되는 듯싶더니, 다시 예전으로 회귀하려는 현상이 만연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도 우크라이나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승용차'보다 '탄약'을 선택했고,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 세웠다. 푸틴의 위협은 자유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불과했고 우크라이나 인들은 그들이 만들어 갈 역사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또다시  '슬래브 서사시'는 우크라이나를 넘어 세계 방방곡곡으로 널리 울려 퍼지고 있다.          


적자생존     


 우크라이나인들이 받아들이기로 한 '죽음'은 철학에서 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재생산을 위한 의미와 결을 달리한다. 문리적인 뜻 그대로 '소멸'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택은 진화론의 입장인 적자생존에는 분명 위배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개체를 보존하기 위해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우선이며, 환경을 거부하여 번식하지 못하는 개체는 진화에 실패한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생존보다 죽음을 택했다. '총 균 쇠'에서는 왜 가축화에 성공한 동물이 그러한 시도에 비해 성공률이 많이 떨어지는 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개처럼 인간에게 친화적이거나 소나 돼지같이 환경에 순응하는 동물들은 다른 종 모두를 압도할 만큼 수가 많은 반면, 야생의 습성을 강하게 가진 종들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인간에게 죽임을 당해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반면 '사피엔스'에서는 진화적 관점은 성공의 척도로서는 불안전하며, 그것은 모든 것을 생존과 번식이라는 기준으로 판단할 뿐 개체의 고통이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황소와 말, 당나귀와 낙타를 순종적인 짐 끌이 동물로 바꾸려면, 이들의 자연적 본능과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고 공격성과 성적 특질을 억누르고 행동의 자유를 빼앗아야 한다. 아마도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할 것이다. 만족한 코뿔소는 자신이 자기 종족의 마지막 개체라는데 아무런 불만이 없다.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우크라이나인들의 선택이 진화의 논리에 반하는 것일까? 적어도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는 철학에서 유물론적인 부분만 강조한 것일 뿐이며, 현상학적 측면들을 무시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현상학이란, 세계와 그 내부의 다양한 실재적 또는 상상적인 존재를 세계가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들에게 나타내고 있는 현상 그 구조를 통하여 연구하는 것으로 관념론의 연장선상에서 서있는 학문을 말한다. 유물론은 사람의 정신과 혼을 배제한 기계론적 세계관에 입각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똑같은 개체로 평가한다. 그것에서 파생되는 이론들이 진화론, 프로이트 심리학, 마르크스주의이며, 더 나아가면 트랜스 휴머니즘에까지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힘이 있는 '종'이 약자들을 지배하는 것은 환경이나 유전적 요소에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관념론보다 구체적이며 객관적 수치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른 나라들이 그들에게 들이댄 객관적 수치화를 거부하고 담보할 수 없는 민족의 미래에 목숨을 걸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유물론은 이러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현상은  유물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직 그러한 이론적 토대 위에 관념론을 덧입혀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은 물리적인 신체를 가진 것과 동시에 정신적인 '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살아있지 않다면 인간은 길들여진 가축에 불과할 뿐이며, 우크라이나 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았다.          


열린사회의 적들     


 힘과 권세를 가진 자들은 그들과 다른 민족들과 계층들을 지배하기 위해, 처음에는 화합과 평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면 본색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며, 다른 이들을 '비인격화'하여 지배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려 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며 제국주의와 세계화는 구분 짓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승자의 입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비인격화'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수용능력에서부터 비롯된다. 예전에 흑인 노예를 운송할 때는 상자 같은 곳에 넣어서 데려왔고, 그들은 가축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그들이 병에 걸려도 마취 없이 수술했다. 왜냐하면 흑인과 백인은 생김새는 비슷할지 모르나, 유인원과 인간 사이에 있는 동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이러한  비인격화는 거짓임을 증명하였다.  즉,  비인격화는 완전히 다른 종에게 행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다.

 지금은 민주화가 많이 확산되었고 그러한 인식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병폐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대로 행해지고 있고 주로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거나 보다 약한 이들에게 덧입혀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린사회의 적들'은 그럴싸한 포장으로 사람들을 호도하면서 동시에 교묘하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고수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특징이 있으며 스스로 정의롭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회 내의 하위집단을 선동하여 싸우게 만들며, 평소에는 자유와 평등을 찬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이 상대방을 비인격화하며 적대시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을 따져보지도 않고 죄악시하는 경향이 짙고, 정치적 신념과 구체적 사실이 모순될 때는 침묵하며 타협에는 관심이 없다. 심지어 그들의 교육 수준은 높으며, 자신들의 사상을 도구로 삼아 교육에 주입하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병폐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진보의 상징인 민주주의와 인권조차도 이러한 프레임이 입혀졌을 때, 자신의 입장과 다른 이들을 '정의'란 이름으로 억압하려고 한다.

 뜻있는 사람들은 제도와 교육을 바꾸면  이상적인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은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만 효과가 있었고 강요된 가치들은 오히려 사회의 질서를 바로잡기보다 도리어 무너지는데 크게 '이바지해 왔다.' 이러한 것은 잔인한 늑대가 사라진 숲에 사슴들이 창궐하여 생태계가 붕괴되는 것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별된 선한 의지는 선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대로 두는 경우가 나을 때도 있다. 이것 또한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어떤 존재의 성장을 그 존재의 한 부분만이 주도할 때 균형이 깨지고 모양이 우습게 된다. 특히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주도할 때, 더욱 그렇다.          


강자와 약자, 자유와 평등     


 니체에 따르면 인류는 '고귀'와 '비천'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강자는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약자를 비천한 것으로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약자 또한 자신을 정당한 존재로, 다른 쪽을 비천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렇게 약자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심리를 그는 '르상티망'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으며 위치만 바뀔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누구든지 정점에 서게 되면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며, 남을 바꾸려 하면서 자신은 바꾸려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그러한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그것이 본래의 취지를 잃고 형해화될 때 그러한 가치들도 권력이 되어버렸고 결국 도태되어 버렸다. 진보가 진화의 다른 표현이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는 능력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했고, 자본주의의 병폐와 맞물리면서 인간을 도구로 격하시켜 버렸다. 반면 유물론적인 시각에서는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 인간의 보이지 않는 속성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약점은 유물론을 토대로 이념을 세워진 공산국가들의 모순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분리될 때,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들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될 때,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그래 왔던 것처럼 '양자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임계점이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사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의 줏대, '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종의 생식과 번식이 진화의 원리이지만 유독 인간의 것이 특별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다른 종과 공유되는 유전자를 넘어선 '얼'이라는 정신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얼'은 우리말로 정신의 줏대라는 말이고, 영어로는 'spirit'라고도 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자유에 대한 노래는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것은 코로나로 차단되어 있던 마음의 벽들을 뚫어버리고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던 '얼'을 각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발언은 '뉴럴 링크'를 연구하는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이 들으면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이 신경다발의 전기자극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크라이나인들의 '얼'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론 머스크도 우크라이나에 인터넷 통신장비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도 '얼'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현상'에서는 인간에게 '얼'이라는 내면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성장할수록 생각의 알갱이들이 자연스럽게 융합하게 되면서, 다른 세계를 포함하는 더 큰 새로운 세계를 낳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20만의 정규군밖에 없었지만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성별, 계층을 막론하고 하나로 뭉쳤고 해외에 나가 있던 동포들과 이들을 돕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지금은 100만의 전력이 되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옹호하며 러시아와의 충돌뿐만 아니라 경제적 손해까지도 무릅쓰겠다는 국가들이 시간이 갈수록 늘고 있다. 심지어 자사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줄 알았던 글로벌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었는데, 이는 돈과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듯하다.     

 람 이전에는 개체보다 종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며 개인이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을 위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원자화되어 갔고 사람보다 물질, 친화성보다 효율성이 더 중요시되었다. 그러던 중 수세에 몰려있던 자연이 사람을 공격하고, 민족주의끼리 충돌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퇴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우크라이나인들이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태도는 아직 인류에게 희망의 빛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패배하게 될지라도 그들의 굳건한 의지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위대한 승리로 영원히 기록되게 될 것이다.          


'오메가포인트'와 '인간 현상'     


 '오메가'는 여러 중심들이 이른 유기체 한가운데서 빛나는 중심으로, 매우 자율적인 하나 아래서 전체의 하나 됨과 각 개체화가 서로 섞이지 않고 동시에 최고에 달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앞서 말한 정신적 속성인 '얼'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오메가'는 자율, 현재, 불가역, 초월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 원자와는 반대되는 속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원자와 분리할 수 없는 실체를 이루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생각의 단위인 '단자'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칼 융은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유전되는 것이라 보았다. 우리가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들이 고대로부터 이어진 '집단 무의식'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로 사람들이 전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한 유전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며, 신약성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방언'의 경우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메가'가 속으로 뭉치고 뭉치면 나중에 생각이 생기는데 나눌 수 없는 전체 덩어리는 생각 밖의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식물과 동물도 원자를 가짐과 동시에 오메가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명에너지는 양자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질료 위에 열과 압력이 가해지면서 형상이 만들어지고, 그 형상 또한 질료가 되어 상위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진화의 계보는 하강의 속성을 가지며, 아래의 가지로 파생되지만, 그러나 아래로부터 위로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원적 존재는 우리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아주 먼, 처음 생긴 별 빛에서 나온 파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화의 과정에서 이미 모든 것을 창조한 파장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빛이 비친다. 과거 속 끝까지 빛이 내려가 비추어낸다. 그런데 우리부터 시작해서 제일 밑까지 이 빛이 드러내는 것은 윤생의 자연현상이 서로 얽혀 끝없이 이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한 것들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우주 또한  그 수없이 많은 여럿이 하나의 조직을 이룬 것이며 그 하나 됨으로 보면 하나의 덩어리이며 그 에너지로 보면 하나의 양자다.  전체가 하나요, 오직 한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도 조금의 반복도 없는 우주의 바탕은 단 하나의 형상일 수밖에 없다. 우주의 바탕은 우주 전체다.  원자 하나하나가 우주만큼 큰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자는 닫혀있는 작은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으면서도 세상 전체의  중심이다.     

 진화의 현실에서 합쳐지고 통합할 때에 반드시 뭔가가 종합의 대가로 소모된다. 우주 에너지 '양자'는 활동하는 만큼 소모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양'과 '음'의 속성을 가지며, 그것은 양성자와 전자로서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띄고 있어 양성자끼리는 서로 밀어내는 전기력인 척력이 존재하나, 양성자와 전자가 만나서 하나의 중성자가 될 때, 전기에너지가 생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에너지는 얻는 만큼 잃게 되며, 잃은 만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는 폭발하며 동시에 수렴되는 '양자 도약'이 일어나며 그렇게 진화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다. 유기체와 무기체는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토대 위에서 진화가 전개되었고, 고등동물일수록 지능이 높고 감정표현이 다양하다. 그런데 특기해야 할 점은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인 속성에 진화가 일어나면서 돌연변이가 생겼고 그 돌연변이도 시간이 지나면 그 종의 기본적인 속성이 되며, 또다시 진화가 일어나게 되어, 결국 질료-형상-질료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동물을 질료로 하여 형상의 과정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동물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다시 말하자면 어류와 양서류, 파충류와 포유류의 습성이 인간의 속성에 그대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침팬지는 잔인하고, 보노보노는 순하다'라는 수준이 아니라 그들 역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응한 것일 뿐이고, 반대로 환경이 바뀌면 습성이 바뀔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공격 본능과 친화력은 '원시세포'에서부터 내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공간과 차원이 빨라지며 변이가 일어난다. 연속 속의 불연속이다. 진화 속의 돌연변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성이 공격 본능이 강하고, 여성이 친화력이 강한 측면도 환경과 학습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유전되는 것 또한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즉, 신체와 정신은 분리할 수 없으며 본능은 본성과  나누어질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게 만든 것은 호기심과 상상력이었다. 그것은 필요와 결핍 속에서 시작되어, 인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역사를 이끌어왔고, 점차적으로 지평을 넓혀나가면서 인지 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의 순으로 전개되어 온 것이다.  인간에게 약속된 미래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팬데믹과 핵전쟁의 위협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쓴 우크라이나인들의  '얼'은 국가와 인종과 민족의 벽을 넘어, '인류애'라는 중심을 서로 연결하며 또 다른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공감 혁명'으로 부르기로 한다. 이러한 '공감 혁명'이 가능한 까닭은 인간에게 반성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성'은 그 뜻대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가 의식의 힘으로써 자신을 대상으로 보고 스스로의 존재와 가치를 헤아리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반성은 단지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을 아는 것이요,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안쪽 깊은 곳에서 자신을 개별화함으로써, 지금까지의 감각과 활동이 순환 속에서 흩어지고 나누어졌던 생명 요소가 처음으로 중심에 모인다. 그 중심에서 펼쳐지는 모든 표상과 경험은 중심으로 모이는 융합체요. 경험하는 주체는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안다. 우리는 그들과 어떤 점이 다를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다. 반성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고 폭넓은 진동 곧 의식의 상승만을 고려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의식들의 상승을 보고 어떤 법칙으로 그것들을 조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여럿이 모여 하나가 될 때, 새로운 인간해방에 이루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데, 그것은 인류 속에 들어있는 동물스런 힘을 점점 얼로 다스려 참된 인류문명을 이룩하는 것, 곧 사람됨의 길을 말한다.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 참된 형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세상은 들끓게 되고 현재가 미래와 뒤 섞이는 혼란스럽고 긴장되는 시기가 온다. 그때는 개인 사이의 대결은 사라지고, 국가와 국가의 대결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현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오메가포인트'이다. 조화로운 집단의식, 그것은 초의식이라 할 수 있다. 지구는 무수한 생각 알갱이들로 덮어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큰 생각 덩어리로 덮이게 된다. 서로의 대립을 넘어서 있는 세계가 우리를 기다린다.  하나 되기 위한 통합이 중심들의 종합이기 때문에 중심과 중심이 만나야 한다.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조각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종착점이지만 시작점인 그날이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 우리가 생겨났듯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태를 향해 우리는 계속 올라간다.             


참고도서

< 인간현상, 테아르 드 사르댕, 한길사, 19997.06.10. >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디플롯. 2021.07.26. >

<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20.07.11 >

<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시상, 2005.12.19.>

< 코스모스,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2886.12.20. >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의 점액과 알 껍데기를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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