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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코스모스

'포스'가 함께하는 코스모스 14

13# 영원의 벼랑 끝

by 비루투스

* 우리에게 익숙한 은하, 별, 행성, 사람으로 구성된 바로 한 단계 위의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소립자에 불과할 수 있다. 이러한 계층구조는 무한히 반복된다. -532p


칼 세이건은 우주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신의 존재에 답이 없다면 우주의 기원에도 답이 없고, 그리고 만약 답이 있다면 우주도 항상 존재했었다고 말한다.

앞의 장에서 언급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불가지론 자임을 감안하여도 자연 만물은 분명 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생명이 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그것을 신의 속성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신은 시간과 형체에 구속받지 않으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했기 때문에 우주도 항상 존재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의 경우라면 칼 세이건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종교는 그것을 믿는 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그를 묘사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 신은 그러한 틀 속에 구속받는 존재가 아니다.

에리히 프롬과 니코스카쟌스키야는 그를 '일자'라고 명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명할 수 없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란 말도 사실상 같은 말이다.

칼 세이건은 각국의 신화를 뻔뻔하다고 표현하면서, 응분의 존경심을 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과학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제안의 사실여부를 검증하기 위하여 실험하고 관찰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신화 역시 그러한 질문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굳이 과학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자면 가설 정도의 위치에 둘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 속에서 가장 최선의 것으로 답을 찾으려 했다는 것에서 의의를 둘 수 있고 또한 그 시대에서는 과학이기도 했다. 그러한 평가 없이 미신적인 것으로만 격하시킬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화에서 나오는 것들이 과학으로 입증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꼭 결괏값이 정확하지 않다고 해서 뻔뻔스럽다고 폄하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과학 이론이라 할지라도 독트린처럼 굳어버리면 마찬가지 아니한가? 왜냐하면 과학은 항상 반증 가능성을 품고 있을 때 '과학'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처럼, 진보의 방향이 직선거리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의 궤도를 돌면서 시간의 방향을 따라 지나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하늘에 올라갔다고 해서 성경의 역사가 종료된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고, 구약과 신약은 동시에 또는 시간차를 두면서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뉴스들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은 영원회귀의 법칙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예수는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바깥이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동양철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몸을 '소우주'라고 표현했고, 그로부터 거대한 담론들을 형성해 왔다. 특히 노자의 '도'사상은 방대한 우주의 법칙을 짧은 경구로 표현한다. 은하들이 만들어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중력의 법칙과 각 운동량 보존 법칙은 우주 어디에서든지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면서도 매우 규칙적인 모양의 것이 있는가 하면, 또 규칙성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있다.

같은 나선은하라고 해도 시선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다 다르다. 그리고 은하와 은하의 충돌은 원래 구형을 이루던 은하단의 모습을 바꿔놓고, 은하도 일부는 죽어 없어지고 동시에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들이 세상 만물과 전 우주에 적용되는 것을, 우리는 '코스모스'라고 부른다.

인간은 우주에 대해 한정된 지식과 좁은 이해의 폭에서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그 지점에 우리가 찾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은 코스모스의 법칙 앞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각자에게 주어진 운명들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우리가 의미 없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칸트는 일반의지를 '보편의지'로 만들라고 했고, 붓다는 집착에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라고 했다. 니체는 '위버멘쉬'를 추구하라 했고,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찾을 것을 가르쳤다.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길'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넓은 길은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우리에게는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이 필요하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빛은 은하 핵 속의 블랙홀을 통해 흡수된다. 그리고 그것은 웜홀을 통해 통과된 후 화이트홀을 통해 최종적으로 방출된다. 우리도 지혜의 빛을 지식을 통해 빨아들이고, 그것을 통한 생각들을 수렴한 후 행동으로 취할 수 있을 때, 눈앞에 놓여있던 좁은 길이 넓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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