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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Oct 18. 2023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문명이야기, # 윌 듀런트, #간디

*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냐? 개인주의냐?' 하는 것도, '유럽이냐? 미국이냐? 하는 것도, 심지어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간이 신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당시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윌 듀런트찾아왔다. 그는 듀런트에게 삶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줄 수 없다면 자살할 생각이라고 다.

 듀런트는 남자에게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라고 언을 해줬지만, 그는 그렇게 해봐도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말했다.  

  상적인 로밖에 할 수 없었던 듀런트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당대에 알려졌던 '명사'들에게도 조언을 요청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사회적 위치에 대답에 응했고, 어떤 이들은 듀런트의 시도에 비꼬는듯한 뉘앙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듀런트와 그의 책


"이 절망의 철학에 대한 당신 의 답변을 성실하게 작성해 보라! 최악을 인지하고 최선을 칭송하며 의식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가 이성적 삶이라는 허울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회의에 답을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로 바로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심과 질문들이 항상 주변을 맴돌았고, 그것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익숙했던 루틴 갑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부담으로 느껴고, 주변은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작했다.  

  남자가 겪고 있는 문제는 지난날의 '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딜레마가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고, 그러한 과정에서  된 것이 바로 윌 듀런트의  '문명이야기'라는 엄청난 분량의 양장이었다. 문장들이 전해주는 울림들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기에 받아 적다가 손목이 시큰거리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얻게된 깨달음은, 삶이란 떠한 단서들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젠가는 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자의 해석에 달려있다는 이었다.


  윌 듀런트는 1885.11.5에 태어나서 1981.11.7까지 거의 한 세대를 바라보고 죽었다.'문명이야기'가 학자로서의 윌 듀런트를 널리 알린 책이라면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는 그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된 에피소드와 다른 사람들과의 서간을 묶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책우리나라에서는 팬데믹 상황과 맞물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진리의 속성


"내가 주일학교에서 얻은 것은 기독교 신앙이 그저 명백한 불합리로 가득하며, 기독교의 신은 미신적이라는 확신뿐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신학책을 여러 권, 아마도 보통의 성직자보다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만 결코 내 마음을 바꿀만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믿고 있던 종교와 그것과 관련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던 때가 있. 그러다  세월호 사건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아마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가해졌던 유. 무형적 폭력들과 더불어 종교와 관련된 사건이라 더 크게 느껴졌것이다.

 소와 달리 어떤 언급도 없이 침묵하고 있는 담임목사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 선거 결과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설교를 듣게 되 홧김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는데, 적어도 그들이 신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러한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여호와는 정의와 공의를 대표하는 신이고, 그의 아들인 예수는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층 나를 더 거슬리게 만드는 것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성도들의 태도였다


  모든 목회자가 그렇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나는 소신 있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기도 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존재 유와  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는 것은 지금도 선한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수가 적고, 입지가 약하. 그리고 대체로 옛것에 대하여 지나간 것으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가치에만 매몰되어 전체적인 관점을 조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다 보면 현실적인 문제점에 계속 부딪게 되고, 결국 그들비판하고 있던 사람들과 점점 닮아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기본적인 틀이 완전히 폐기되는 경우는 없다. 런데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싶어 하고, 믿고 싶어 한다. 오히려 일말의 진실은 각각 중첩되는 영역 속에 숨겨져 있는데도 말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칼린 지브란의 '인간의 아들, 예수'에서 받았던 인상들이 떠올랐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만 묘사하고 있지만, 신약성서 곳곳에서는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는 대목들이 상당하다. 지브란은 그러한 역설 가운데에 예수를 두었고, 주변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입장에서 각기 예수를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었다. 나는 구세주  예수의 이미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칼릴 지브란이 묘사하는 예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스승이자 구원자였고 동시에 죄인이자 사기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는 정작 자신을 비롯하여 그 누구에게도 어떠한 평가나 변명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의 속성을 해했다.


유사성 원리


"믿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으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고정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각각 보편자와 상대자의 위치에 서게 되며, 그것을 궁극적인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 시원은 '유일자'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듀런트의 책을 읽으면 그러한 단서들을 찾아, 교차꼭짓점들을 하나씩 연결해 가기 시작했다.

 '유일자'를 언급하는 어떤 힌두 사상가의 사상 속에서 만물에는 신의 의지가 깃들어있다는 가르침은 얻었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 인격신만을 인정하는 종교 속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국사 시간에 배웠던 의상대사의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키며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었. 그리고 사물에 다신교처럼 신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있게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가장 중요한 조항과도 충돌하지 않는. 그러한 단서들이 가지는 의미들을 중첩시 후 원성을 추적하다 보면 궁극적인 '일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대해 종교는 '신'이라고 부르고, '물리학'은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철학에서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의미가 각각 달라게 된.


 관점의 폭이 넓어지면서 사물과 심성을 연결하여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연결하고 있는 설명하는 '이기론'이 얼마나 심오한 이론인지 깨닫게 되는데, '문명이야기'에서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은 철학의 변방에 있는 나라가 결코 아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리'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통 '리' 만세 이전부터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원리를 말하며 반대로 '기'는 대적이고 일시적인 측면이 강한 특징이 있다는 원리데, 심성론 쪽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사단칠정론' 발전하게 다.

 사단은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측은지심' 같은 개념으로 '리'의 속성을 가지며, 대체로 '선'하거나 '귀'하다고 평가된다. 이와 반대되는 속성으로 '칠정'은 우리의 감정적인 특성 있으며. 주로 '희, 로, 애, 락' 등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일시적이며 휘발이 있어, '악'하거나 '천'하다고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 같은 학술논쟁이 나오게 되었고, 그것은 어떤 에 주안점을 두는가에 따라 관점과 결론이 달라지게 된다.


  나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상들 사이의 유사성 차이점을 연결해 가며 '베다'와 '우파니드'까지도 할 수 있었.


간디가 받아들이는 진리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둠과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있습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 중에서 나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인물은 바로 '간디'이다.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계속 살아가게 한다.'는 말로써 듀런트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했다.

 간디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개방적인 사고를 가인물이었고, 영국의 지배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다.           변호사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식민치하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모멸감은 민족이 처한 진실에 눈을 뜨게 만들었고, 그것 개인의 문제를 넘어 민족과 세계, 그리고 진리의 영역에까지 인식의 폭을 넓 되었다. 고통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진리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만 갔다.

 디는 대외적으로는 다신교인 힌두교를 믿는다고 했지, 종교와 철학의 근본적인 가치는 진리 안에서 하나라고 생각했다. 윌 듀런트는 그러한 간디를 역사상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종교 지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었다.


 간디는 양자적인 관점에서 균형을 조율하려고 했고, 그러한 노력은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자서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완전'이란 단어는 통상적인 뜻으로 받아들이는 '완벽'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채워져 있다.'는 정의가 합리적인 해석에 깝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완전하게 구성 세계와 달리 불완전한 존재로서 던져지지만, 세계를 모방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더욱 나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진리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도덕관념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선과 악이 구별될 수 있고, 인간은 선한 것을 택함으로써 함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칸트와 루소의 '일반의지'와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 포함하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비 이론과 교리들은 이러한 '총체성'과는 거리가 멀, 자신들만을 '절대선'으로 인식하면서 상대방을 '악'으로 배제는 경향이 강하다. 어느 정도는 그 주장들이 설득력 있게 들릴지 몰라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논리적인 근거는 희박해지는데, 그것은 현상적인 개별 사건을 일반화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상에만 집착하여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이데올로기가 가지게 되는 모순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


 윌 듀런트는 종교와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개별적인 것을 넘어 집단화되면서 이상과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고, 현실적인 측면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책의 번역자는 해설 편에서 듀런트를 비판하고 있는데. 텍스트가 풍기고 있는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리학에서 '+'는'+'를 밀어내고. '- '는 '-'를 밀어내는 속성이 있지만,  '+'는 '-'와 양립할 때 공존할 수 있다. 그러한 원리를 통해, 상생의 의미에서 텍스트를 파악하게 된다면 훨씬 풍부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런데도 종교와 사회주의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존의 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고발사회 문제점이 무엇인지 진단하여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닫게 만다는 것이다. 상은 그렇게 맞물리며 다시 돌아가다.

 

삶이 완성하는 예술


"나는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속 움직이면서 모종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설사 내게 재능이 부족하다 해도 움직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요. 게다가 희망은 항상 존재하니까요. 적어도 젊고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이지요."


  많은 사람진리라는 가치가 고귀한 의복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이해하고 있지만, 정작 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막상 초라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나타나면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현대사회는 분명히 이전 사회보다 자유롭고 평등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압박감을 느끼는 이유는 끊임없이 결과물을 산출하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계발'이란 명목으로 무의식적인 측면까지 착취당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데, 심지어 우리가 진실과 진리의 영역이라고 믿고 있는 까지도 매매가 가능해지게 되었. 마약중독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사이비들이 판치고 있는 현실이 이러한 현상들을 방증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에세이'나 '강연'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하지 못면서 그렇게 현실을 도피하거나 합리화시키는 것이 '삶'에 있어 어떤 의미 있을까? 나는 그러한 입에 발린 듯한 말들을 할 수도 없고, 해서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픈 부위는 드러내야 치유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그러한 상술에 '양심'아서 안 되는 것이다.

 

 모범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삶'이 주는 묵직한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하나의 관점에 매이기보다는 '무엇인가'를 향해 찾아가고 있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철학과 과학이 영혼을 인정하든 말건 상관없이 꿈과 이상을 믿었, 진실은 합리적인 일반화가 아니라 직관적 상상력에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가장 끔찍한 환멸의 순간에도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에 있어 '의미' 결과 상관없이 자체에서 발산되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연상되는 각들에 확신 는 것 아닐까?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있더라도 극적인 순간에 잠시 머무는 것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레마와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의 언어로 처해있는 상황 해석하려고 노력하게 는데,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를 '실존'이라고 표현했다. 비로소 인간은 사물과 자신관계에서  의미를 깨닫게 다.

 종교인들은 신이 주는 황홀경으로써 이러한 순간을 묘사했고, 철학자들은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다.   듀런트는 그러한 경지인간을 인도하게 되는 것은 직관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는데, 그것은 모든 예술의 원동력 '일맥상통'한다.


 '삶'에 있어 적어도 몇 번은 바닥에 패대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는 같은 행위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 차이점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데,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처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고, 바꿔야 하는 것을 바꾸려는 강한 의지도 아니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상상력을 불러들여 다시 회복하는 이었다. 금도 삶이 어떤 것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확신을 고 이야기할 수 게 되었다.


 왜 살아야 는지에 관한 질문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 의문을 가지고 살다가 보면,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깨닫게  날이 찾아오게 되고, 그 하루는 이전과 다른 날이 될 것고 믿는다.



인간은 역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우주, 어느 정해진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의 필수적인 일부분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이론에는 나도 수긍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수형자가 듀런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참고도서


<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윌 듀런트, 유유,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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