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 그런데 깨어보니 나 혼자더군. 그 새는 날아가버린 후였지. <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 >
1997년,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이 부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기도 했고, 나라 전체가 빚 때문에 휘청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서 '상실'이라는 단어만큼 그 시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었을 것이다.
2019년,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었을 때 텅텅 비어있던 공항에 교민들이 쫓기듯이 들어왔고 그때처럼 승객들이 질서 정연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당연했던 것들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지방사무소로 파견을 떠나야만 했었고, '성북동비둘기'처럼 이미 사라져 버린 흔적 속에서 익숙했던 것들을 되살리고만 싶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사람들까지 그리워졌고, 그때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날엔 자기 계발서와 부에 대한 지식들이 유행하고 있고, 그에 따라 살게 되면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 착취'에 다름 아니다. SNS가 종교를 대신 사람들을 지배하고, 인플루언서들이 전문가보다 더 영향력을 가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신앙 대신 '소비'가 미덕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꿈과 희망은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트럼프 시대'를 맞이하였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도박하듯이 내맡겨야만 한다. 갈수록 퀘스트의 난도는 높아지기만 하고, 꽃피는 봄은 점점 짧아지고만 있다.
우울한 기분이 갑자기 엄습해 올 때면 나밖에 모르는 조용한 공간에서 그냥 슬퍼지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하루키의 소설을 책장에서 다시 꺼내 들고, 예정되지 않았던 어떤 장소로 무작정 떠난다. 그리고 분위기가 차분하고 가사 없는 음악이 흐르는 카페를 찾아 들어간다. 이왕이면 콜드브루가 시그니처인 곳이었으면 좋을 것이다. 문장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목 넘김이 깔끔한 커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책장을 뒤적이다가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을 노트에 끄적이다 보면 손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잔잔한 파문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딘가에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1)
작품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다. 하루키는 소설에서 비틀스의 동명 노래를 언급하고 있는데, 가사를 해석해 보면 화자는 우연히 매력적인 여자를 만나지만, 그녀는 마음을 허락하지도 않고 감정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내킬 때만 그를 원할 뿐,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화자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했고, 그러자 여자는 새처럼 떠나가 버린다.
하루키는 우연히 듣게 된 비틀스의 노래에서 노르웨이에 관한 어떤 인상을 떠올리게 된 것 같다. 뚜렷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는 않지만, 작품 속에서는 푸가처럼 반복되고 있으면서 각 장마다 고유한 결이 느껴지게 만든다. 그것은 함께 있지만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기도 하며, 군중 속의 고독이자 자기만의 세계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이름은 와타나베이며, 37살의 '나'는 비행기에서, 익숙했던 어떤 멜로디를 듣게 되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어떤 기억을 통해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작가의 다른 글에서는 일본에 오게 된 후,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르웨이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모티브가 되었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그리운 지난날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
"안녕!" 하고 나도 인사했다. 2)
그녀가 갈구하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팔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온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온기이다. 3)
소설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시작되며, '나'로 지칭되는 와타나베와 주인공의 유일한 친구인 '기즈키', 그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와의 관계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며, 작가는 이러한 삼각구도의 전형적인 의미를 살려, 대립, 갈등, 조화 등을 통해 복잡한 역학관계를 해소하고, 다양한 상징적 요소들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기츠키'라는 이름은 '기둥'과 '축'을 의미하며 그는 나오코의 첫사랑이지 와타나베의 친구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하는 경계이자 중심축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오코'에는 '직진' 또는 '정직'을 뜻이 있으며, 그녀의 진솔한 성격과 순수에의 지향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인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건너다.', '다리'라는 의미가 있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넘어 삶과 죽음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역할이 주어져있다.
소꿉친구인 나오코와 함께 그들만의 '노르웨이숲'에만 머물러있었던 기즈키는, 와타나베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려 하지만, 성장의 문턱에서 마찰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나오코는 기츠키가 죽기 전에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이 아닌, 와타나베라는 사실에 강한 질투심을 느끼면서도 그를 통해 남아있는 기츠키의 흔적을 찾는다. 와타나베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차지하면 할수록 기즈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갔고 나오코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의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나오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을 다하려고 했고, 그녀와 함께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돈을 열심히 벌기도 했다. 하지만 나오코는 결국, 기츠키와 함께하는 길을 선택했다.
와타나베는 또다시, 선배인 '나가사와'와 그의 여자친구인 '하쓰미'와도 삼각구도를 이루게 되는데, '나가사와'란 이름에는 '긴 강'이라는 뜻이 있고, '기츠키'와는 대조적인 성격으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도 주어진 상황과 조건들을 잘 이용하여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극단적이고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와타나베는 그런 나가사와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극단적인 정도의 합리성에 반감을 품게 되고, 상처받으면서도 그 곁을 지키려 하는 하쓰미를 안쓰럽게 생각하지만 이해의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어떤 측면에서 그들은 와타나베의 양면적인 속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쓰미'는 '나오코'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첫 번째 아름다움'. '순수함'을 상징하지만, 나오코가 기츠키를 향해서만 가는 것처럼, 나가사와는 이상만을 좇는다는 점에서 나오코의 위치와 대칭적이다. 나가사와가 외부적 세계로의 지향을 추구한다면, 나오코는 내부적으로 천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둘은 구분되고,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하쓰미와 와타나베는 그들의 세계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나가사와와 나오코는 각각 자신만의 '노르웨이숲'으로 떠나버렸다.
나가사와와의 이별을 견디지 못한 하쓰미는 자살을 선택하고, 그녀를 그렇게 내버려 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와타나베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설을 받치고 있던 삼각구도의 한 축이 무너지면서 다른 축까지 완전히 붕괴해 버리고 만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 이미 오래전에 어딘가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쓰미 씨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4)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5)
살아가다 보면 과거에 대한 것들은 점차 희미해지고,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학습하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현실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것에 취약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소설의 배경은 '58 혁명'이 시대의 조류였고, 당시의 학원가는 공산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그들의 이상대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곧 올 것처럼 여겨졌지만, 와타나베는 허울적인 모습 속에서 회의를 느낄 뿐이었다.
나오코와 나가사와는 각각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만을 진정한 것으로만 받아들이며, 그것은 무의미한 자위와 섹스로 표상된다. 결국 나오코는 과거에 집착한 채로 심연의 어둠에 빠져버렸고, 나가사와는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며 미래를 지배하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미도리는 그들과 달랐다.
'미도리'란 이름은 '초록'과 '녹색'을 뜻하며, 그녀의 밝고 활기찬 성격을 드러내면서도 '생명', '희망', '재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다른 인물들에게 결여된 있는 요소들을 그 이름 속에 듬뿍 담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딪히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누가 뭐라 해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한 태도는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구를 사랑하건 말건, 나를 바라봐주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이겨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6)
나오코의 자살로 인해, 와타나베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정처 없이 길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방황의 여정 가운데서도 생리적인 욕구는 계속되었고, 그렇게 삶은 와타나베에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던져주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로써 기중기와 같은 것을 이용하여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수법을 말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레이코'란 여자에게 그 역할이 부여된다. 그녀는 실패한 결혼생활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경험한 인물이지만 정신병으로 힘들어하는 나오코의 보호자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레이코는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오코와 그런 그녀를 구제하려는 와타나베와의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게 되고, 나오코의 죽음 이후에는 영적인 매개체의 역할을 당당하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형상화시킨다. 이로써 삶과 죽음 그리고 이상과 현실은 하나의 세계로 수렴되었고, 와타나베는 그동안 겪었던 고통의 과정을 받아들이며, 미도리와 함께 남아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과거의 추억들을 쉽게 놓지 못하고, 또다시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전화부스 속에서 미도리를 애타게 부르는 와타나베의 모습을 그리며 소설은 끝을 맺지만, 액자식 구성의 특징을 살려, 비행기 속에서 지난날의 기억을 회상하는 37살의 와타나베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끊임없는 과제를 통해 인간은 다시 또 방황하게 되고,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7)
『노르웨이의 숲』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Ⅰ. 서론: 시대적 상실과 개인의 기억
- 1997년 대우그룹 부도 및 2019년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사회적 충격과 개인적 상실을 연결
-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시대 정서를 포착
Ⅱ. 현대 사회의 가치 전도
- 자기계발과 부의 신화가 자기 착취로 이어짐
- SNS와 인플루언서가 종교적 권위와 전문가의 역할을 대체
- 소비 중심의 가치관이 꿈과 희망을 배타적으로 만듦
Ⅲ. 문학적 위안과 감정 정화
- 하루키의 소설을 통한 감정적 회복
- 독서 환경(조용한 공간, 콜드브루, 음악 등)을 통한 내면 정리
- 문장을 통한 감정의 파문과 자기 성찰
Ⅳ. 작품 해석: 상징과 구조
- 비틀스의 「Norwegian Wood」와 소설의 상관성 분석
- 반복되는 거리감과 고독의 상징
- 기억과 상처를 푸가처럼 구성된 서사로 표현
Ⅴ. 삼각관계와 인물 분석
- 와타나베–기즈키–나오코, 나가사와–하쓰미–와타나베의 관계 구조
- 인물 이름의 상징적 의미 분석을 통해 역할과 성격 해석
- 삼각구도를 통해 상실, 질투, 성장의 역학 구조 드러냄
Ⅵ. 이상과 현실의 충돌
- 나오코와 나가사와는 각각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며 현실 회피
- 미도리는 현실을 수용하고 생명력과 희망을 상징
- 각 인물의 사랑에 대한 태도 비교를 통해 주제 확장
Ⅶ. 삶과 죽음의 경계 및 구원
- 나오코의 자살 이후 와타나베의 방황
- 레이코의 등장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구원 구조 형성
- 삶과 죽음, 이상과 현실의 통합적 수렴
Ⅷ. 결말: 미완의 이야기로서의 삶
- 전화부스에서 미도리를 부르는 와타나베의 모습으로 마무리
- 액자식 구성으로 회상의 시작으로 회귀
- 삶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며, 인간은 계속 방황하며 의미를 탐색
♧ 참고자료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7.08.07.>
1) 12p
2) 11p
3) 62p
4) 415p
5) 567p
6) 567p
7) 567p
8) 55p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편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 있는 게 아니다. 8)
< 노르웨이의 숲 >
그 멜로디가 귓가에 들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눈앞에 서있는 듯한 사람과 사람들이,
손 앞에 닿을 것 같은 장소와 장소들이
기억이 떠오른다. 얼굴이 떠오른다.
모든 게 너무나도, 선명히 떠오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나는 아무렴 좋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나의 온기가 아니다.
그것은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아픔은 없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저 울적한 울림이 있을 따름이다.
잃어버렸던 많은 것들
잃어버린 시간, 떠나간 사람들, 돌아오지 않을 추억
그 울림마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이 끝내 사라져 버렸듯이.
&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될 때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을 느낀다. 왜 그런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다시 읽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주인공처럼, 소중한 어떤 것을 기억의 언저리에 두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다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시 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시간은 내게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서 그 기억을 떼어낸다면,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던 '나'가 아니게 된다.
이제는 눈물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나이가 되어버렸고, 그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무덤덤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근처에 있는 전화부스로 들어갔다. 천장 위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내 마음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