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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블루스

#기억

by 비루투스

새 침대 위엔 낯선 숨결이,
창밖 나무는 조용히 묻는다.
"왜 왔니, 여기?"

지천명의 문턱 위
설렘은 희미해지고
두려움이 조심스레 번져온다.

혼잣말이 시처럼 떠오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쩌면, 그때처럼, 하다 보면 되겠지!

넥타이를 매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본다.
문을 열고 나간다. 해가 천천히 떠오른다.

황무지 선인장이 새벽이슬을 머금듯,
낯선 땅에 나는 흔적 없이 스며들리라!


비처럼, 음악처럼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또 어떠하리


「서울 블루스」는 도시의 새벽을 배경으로, 낯섦과 적응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의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시적 화자는 새 침대 위의 낯선 숨결을 감지하며, 창밖 나무의 질문을 듣는다. “왜 왔니, 여기?” — 이 질문은 단순한 공간의 낯섦을 넘어, 존재의 이유와 방향을 묻는 철학적 물음처럼 다가온다.


지천명의 문턱 위에서 설렘은 희미해지고, 두려움이 조심스레 번져온다. 이 구절은 나이와 시간의 무게, 그리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의 불안함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화자는 혼잣말처럼 되뇐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이는 고려가요의 구절을 인용한 듯한 표현으로, 체념과 수용의 태도를 동시에 담고 있다. 어쩌면, 그때처럼, 하다 보면 되겠지. 이 말은 불안 속에서도 행동을 통해 길을 찾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넥타이를 매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는 장면은 자기 확인의 순간이다. 문을 열고 나가는 행위는 단순한 외출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다. 해가 천천히 떠오른다는 묘사는, 그 진입이 급박하지 않고, 조용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의 정점은 이 구절이다:

“황무지 선인장이 새벽이슬을 머금듯, 낯선 땅에 나는 흔적 없이 스며들리라!” 이 문장은 적응의 방식에 대한 선언이다. 화자는 도시를 정복하거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선인장처럼 조용히, 그러나 생명력 있게 스며들기를 원한다. 그것은 존재의 겸손함이자, 생존의 지혜다.


마지막 구절 “비처럼, 음악처럼”은 이 시의 정서를 가장 잘 요약한다. 비는 스며들고, 음악은 울려 퍼진다. 둘 다 자연스럽게, 그러나 깊게 공간을 채우는 존재다. 시적 화자는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서울 블루스」는 단순한 도시 적응기의 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고요한 선언이며, 낯선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감정의 블루스다.


“나는 이 도시 속에서 어떠하든지,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 취업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독서모임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발견한 ‘베이트리’라는 이름의 모임은 서면의 한 커피숍에서 첫 회동을 가졌다. 공간이 없어 커피숍에 얹혀 지내며 책을 읽고 토론했다. 직업도 다양하고 개성도 강한 사람들이라서, 알아갈수록 주제가 넓어졌고 책에 관한 것 이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우리 모임의 이름은 ‘토요일 아침 모임’, 줄여서 ‘토모’였다. 꾼들은 꾼들을 알아보는 법. 누군지도 몰랐던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코드'가 맞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침 10시에 모여 세 시간 동안 토론하고, 점심을 먹은 후 게임장에 들렀다가, 야구내기를 하고, 호프집에서 노래방으로, 마지막엔 스타벅스에서 입가심까지. 그렇게 하루가 흘러 집에 들어가니 밤 12시가 되었고, 그날이 우리의 첫인상이었고, 캐릭터가 되었다.


직업군도 다양했고, 개성도 강했다. 그 무리 속에서 내가 가장 평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공무원 노조위원장을 하던 형님이 있었다. 일찍 공직에 입문했고 나보다 몇 살 많기도 해서 또래들보다 승진이 빨랐다. 시청에 개인 사무실이 있어서 근무시간이 아니면 그곳에서 독서모임을 하기도 했고, 시청 주변 맛집을 꿰고 있어서 뒤풀이 때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는 덩치도 크고 나이도 적지 않았지만, 일단 의식이 젊었고, 몸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대학교 때 브레이크 댄스를 췄고,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장기자랑 때 시장님 앞에서 췄던 춤이라고 영상을 보여줬는데, 춤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와 통하는 지점이 있었다.


내가 인천공항으로 발령 난 후 예전처럼 모임에 참가할 순 없었지만, 회원들과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이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간다는 출사표를 단톡방에 남겼다. 새로운 임직에 대한 부담, 부산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염려가 담긴 메시지였지만, 특유의 유머와 넉살도 여전했다.


그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문장 속 리듬과 운율을 느꼈고, 시로 만들어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장에 메시지를 옮기고, 형님에 대한 인상과 각오를 떠올리며 문장을 다듬었다. 조직에 스며들고 싶다는 그의 포부에서 나는 선인장이 빗물을 빨아들이는 장면을 떠올렸고, 자연스레 ‘비’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함께 노래방에서 불렀던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생각나, 그 가사를 시 속에 살짝 녹여 넣었다.


그 시에는 낯선 도시에서 시작될 형님의 새로운 하루에, 나의 응원과 조용한 의미를 담았다.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할 마음을 문장에 실어, 그가 걸어갈 길에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단톡방에 시를 올리자 형님은 “무슨 시를 그렇게 빨리 쓰냐”며 웃는 답글을 남겼다. “글이 좋아서 금방 적었다”라고 하자, “시가 좋다”며 서울에서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다시금 깨달았다.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도,

조금의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다 보면

언젠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사람도 그렇다.

내 개성을 알아주고,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정말 감사한 일이다.


비처럼 스며들어,

음악처럼 남는 사람들,

그런 인연들 쌓이면서

내 삶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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