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쑥 캐러 왔어! 엄마가 아팠을 때,
너랑 걸었던 그 길까지 와버렸어.
새들이 반가이 노래하고,
웃고 있는 꽃들이 춤추네!
자전거 탄 애들이 건강하게 지나가고 나니,
연두의 푸르름이 생명력으로 다가오는구나!
“쑥 캐러 왔어!” 이 첫 문장은 시의 정서를 단숨에 결정짓는다. 그건 단순한 일상의 보고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기억을 되새기며 아들에게 말을 거는 엄마의 마음이다.
“엄마가 아팠을 때, 너랑 걸었던 그 길까지 와버렸어.” 이 구절은 기억의 회귀다. 몸이 아팠던 시절, 아들과 함께 걸었던 길. 그 길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회복과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서적 공간이다. 그 길에 다시 와버렸다는 말은 무의식적 감정의 회귀를 보여준다. 엄마는 쑥을 캐러 갔지만, 결국 아들과의 기억을 캐고 있었던 것이다.
“새들이 반가이 노래하고, 웃고 있는 꽃들이 춤추네!” 자연은 엄마를 반긴다. 새는 노래하고, 꽃은 춤춘다.
이 장면은 자연이 감정을 받아주는 존재로 형상화된 순간이다. 엄마의 내면이 자연과 연결되고, 그 연결은 기억을 위로로 바꾸는 과정이다.
“자전거 탄 애들이 건강하게 지나가고 나니, 연두의 푸르름이 생명력으로 다가오는구나!” 이 구절은 시의 정서적 전환점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지나가고, 연둣빛 푸르름이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연두’는 단순한 색이 아니라, 회복과 희망, 생명의 상징이다.
엄마는 아팠던 기억 속에서 지금의 생명력을 발견한다. 그건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삶이 계속된다는 감각, 그리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생의 메시지다.
「엄마가 아들에게」는 기억과 자연, 사랑과 생명이 하나로 엮인 시다. 그건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삶의 시적 편지다.
& 이 시는 전적으로 제가 썼다기보다는, 엄마가 사진과 함께 보내준 카톡 메시지를 토대로 재구성하고 리듬을 부여해서 만든 것입니다.
부산에서 근무할 때, 자주 갔었던 구포도서관에서 시창작 수업을 개최한다는 공고를 보고, 엄마와 함께 참가했습니다. 그 수업에서는 격주로 한 주는 인문학 수업을 하고, 다른 주는 시창작 수업을 했습니다. 그때 과제로 강사님은 디지털 사진을 찍고, 그 사물이 주는 이미지에 대한 시를 써오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그 과제를 두고 끙끙댔고, 그러고 있는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렸을 때 책을 읽히고, 글쓰기 과제를 해줬던 사람이 바로 엄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엄마가 집 근처 생태공원에서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메시지와 함께 보내줬습니다. 저는 그 텍스트에서 운율과 리듬감을 느꼈고, 엄마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문장들을 토대로 시를 만들어서 엄마에게 보냈는데, 엄마는 천역덕스럽게 자기가 쓴 거라며 과제로 제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사기치는 것 아니냐”고 말하자, 엄마는 “엄마가 젊었을때 책을 많이 읽었었기 때문에 그게 네 머릿속에 있는 거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독자들은 이 시를 읽을 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겠지만,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복받쳐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건 엄마가 크게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얼마 안 있어 엄마까지 병원에 입원하셨죠. 그리고 그해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연달아 터졌고, 저는 그때 백수 신분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생이 저보다 훨씬 일찍 취업했고,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엄마를 입원시켜 병간호까지 다했었죠. 저는 시험 앞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집에 있었습니다. 그때 참고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해 시험에 붙었던 것도 아니었고, 또 떨어졌습니다.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군요.
엄마가 그때 병원에서 꿈을 꿨는데,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에게 “애들 놔두고 절대 죽을 수 없다”고 말했다더군요. 집에 돌아온 엄마는 모자를 쓰고 왔는데, 그것을 벗으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랑 시장 가면 계란만두를 사달라고 졸랐던 게 기억이 납니다. 계란만두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전처럼 부치고, 당면과 야채를 올려 그 위에 계란을 올려 만두처럼 굽는 것입니다. 먹을 때는 그 위에 양념간장을 뿌렸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엄마는 계란만두를 먹는 동안 장 보고 온다며, 그 자리에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맛있게 먹고 난 후 한동안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멀리서 엄마가 보이면 냅다 뛰어가 안겼습니다.
엄마는 명문고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공부도 잘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전혀 지원을 못 받았고, 어떤 날은 속이 상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입양 보내달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집안 사정과 여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공부를 접어야 했고, 엄마는 취업을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지금은 SK석유화학의 전신인 유공에서 근무하다가 이모를 통해 아버지를 만나 나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결혼 전에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저는 엄마 덕분에 5살 때 이미 한글을 배웠고, 7살 때는 세계문화전집과 위인전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문학적 재능이 있다면 아마 엄마의 영향이 가장 클 겁니다.
예쁘고 똑똑한 우리 엄마. 이건 내 엄마라서 미화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 같이 다니면 “너네 엄마 맞냐”는 소리를 자주 듣곤 했기도 했습니다.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게 된 계기도 사실 저 때문입니다. 직장을 마치고 제가 집에 보이지 않아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그래서 경찰서에까지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뒤늦게 제가 돌아오자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잠시, 보이자마자 뒤지게 팼다더군요. 그 이후로 아예 직장을 그만두었고, 엄마의 꿈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한번씩 물어봅니다. “왜 굳이 부산에 내려와서 나를 낳아서 서로 피곤한 일을 만들었냐” 고,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낳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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