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편집

라캉의 시선으로 하루키 문학 분석하기 2

국경의 남쪽과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하루키#, 정신분석학#, 자크라캉#

by 비루투스

* 하나의 소용돌이가 생겨나면 그 소용돌이로부터 또 다른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또 다른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판타지가 혼재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는 프로이트적인 접근을 통해 개인의 욕망과 내면의 갈등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 주변 환경과의 간극 속에 놓인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이 각자의 시선을 투영하고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한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비교적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작가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치유와 구원의 가능성까지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하루키의 세계관 속에서도 이례적이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상상계와 소외


어렸을 적에 나는 이 ‘외동아이’라는 말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에겐 뭔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곤 했다. 그 말은 늘 나를 업신여기는 말로 들리곤 했다. ‘넌 불완전한 인간이란 말이야.’ 하고. 2)


주인공 ‘하지메’는 이름 그대로 ‘시작’을 의미하지만, 소설의 배경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정점을 지나 쇠퇴기로 접어든 시기로, 그의 이름과는 상반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역설적인 뉘앙스를 준다. 당시 외동아이는 부모의 응석을 받아 허약하고 버릇없다는 인식이 강했고, 하지메 또한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한편, 하지메와 대칭되는 시마모토는 같은 외동이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차분한 태도를 지닌 반면,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또 다른 결핍과 대척점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메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시마모토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외골수이며 제멋대로인 하지메와 달리, 시마모토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대인 관계도 원만했지만, 신체적 콤플렉스로 인해 사람들 앞에서는 늘 위축되었고, 이는 그녀의 심리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메는 시마모토와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하며 그녀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면모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은 결국 하지메로 하여금 점차 시마모토와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하지메와 시마모토의 관계는 프로이트의 '자기애'적 단계와 라캉 '상상계' 및 '거울 단계'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프로이트가 말한 초기 자기애는 유아가 외부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형성하는 자아의 기초이며, 라캉은 이를 확장하여, 생후 6~18개월 사이 아이가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하며 '통합된 자아'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거울 단계를 제시하였고, 이 시기를 인간 주체 형성의 시초로 보았다.


이 시기의 자아는 외적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로 형성되며, 이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Imaginary)’의 출발점이 된다. 이 상상계는 현실과 판타지가 혼재된 구조 안에서 자아를 환상적으로 구축하게 한다.


하지메가 시마모토에게 특별한 끌림을 느낀 것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자신이 결핍한 무엇인가를 상상적으로 보완하려는 무의식적 동일시의 작동이었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에게 자아의 이상적 거울상이자 욕망의 매개체였고, 그에 대한 애매한 감정은 곧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메는 그녀에게 느끼는 욕망을 곧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를 억제하거나 회피하며 결국 불안을 겪게 된다.


또한 라캉에 따르면 주체는 상상계를 지나 언어와 규범이 지배하는 상징계(Symbolic)에 진입하면서, 타자의 언어와 질서 속에서 자아를 재정립하게 되며, 이로 인해 본질적인 욕망과 분리되고 소외된다. 이 소외는 단지 타인과의 거리감이 아니라, 자아가 언어와 사회 질서 속에서 형성된다는 구조 자체에 기인한다. 이때 ‘대타자(the Big Other)’는 상징계의 총체로서, 주체가 소속된 외부의 질서이자, 언어, 규범, 법률 등의 기호를 매개로 주체를 위치 짓는 거대한 구조이다. 주체는 대타자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말하고, 타자의 욕망 속에 자신을 배치하며, 결국 자신의 욕망조차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계의 그물망으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결핍이 존재한다. 라캉은 이처럼 상징계의 틈새로부터 새어 나오는 잉여적 흔적, 즉 의미화되지 않으며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표식을 작은 대상 a (objet petit a)라고 불렀다. 작은 대상 a는 대타자의 질서 속에서는 결코 고정되거나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과잉으로서, 주체의 욕망을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자극하는 '잔여'이다.


하지메는 시마모토와의 관계를 통해 이러한 결핍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를 통해 이상적 자아상을 투영하고 동시에 타자와의 분리를 인식하면서, 자신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결핍된 것임을 자각한다. 그는 시마모토를 통해 무언가를 회복하고자 하지만, 이미 상징계 구조 안에서 소외된 주체로서 그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그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불안 속에 깊이 잠식된다.



기의와 기표, 결여


내가 읽는 책이나 내가 듣는 음악을 그녀는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런 영역에 관해서 우리가 대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 3)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기표(형태)와 기의(의미)의 관계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안정한 기호 구조 속에서 주체는 항상 의미의 결핍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 욕망 또한 타자의 언어와 기표 체계에 의해 구성될 뿐이다.


하지메는 고등학생이 되어 외동아이로서의 고립에서 벗어난 듯 보였지만, 여전히 시마모토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메는 무의식의 언어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지만,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안정한 미끄러짐 속에서 욕망은 언제나 결여된 채로 남는다. 그녀는 하지메에게 있어서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서 결핍을 일으키는 작은 대상 a로 작용하며, 환상의 중심에 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이다.


반면, 이즈미는 라캉의 ‘상징계’를 체현하는 인물로, 언어와 규범, 사회적 가치에 의해 형성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즈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여긴 가치를 욕망하며 자라왔고, 그런 그녀에게 하지메는 그 질서를 벗어나려는 불완전한 존재로 비칠 뿐이다.


하지메는 육체적 욕망을 통해 억압된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려 하지만, 이즈미는 이를 불쾌하게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하지메는 상상계(시마모토)와 상징계 (이즈미) 사이의 간극에서 방황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더 깊은 결핍과 혼란 속에 휘말리게 될 뿐이었다.



실재계


형태가 있는 건 하나같이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지. 하지만 어떤 유의 생각이라는 건 언제까지고 남는 법이지.


하지만 하지메, 그런 생각이 남기 때문에 그만큼 괴로운 감정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4)


하지메는 여행 중 유키코를 만나 결혼한다. 평범한 외모와 무난한 성격을 지닌 유키코와의 결혼은 그에게 안정된 일상과 재즈바의 성공이라는 외형적 완결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여전히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있고, 이즈미와 시마모토의 재등장은 그 균열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이즈미는 과거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벗고 상처와 원한을 안은 채 나타나며, 시마모토는 더 이상 다리를 절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지메에게 시마모토는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결핍의 잔여—즉 작은대상 a—로 작용하며, 그녀의 현실적인 등장은 하지메가 구축한 이상화된 기억(환상)과 충돌을 일으킨다.


시마모토의 신체적 결핍(절름발이)이 사라진 모습은 하지메의 환상과 충돌하며, 그의 욕망이 의지하던 결핍마저 무효화된다. 이는 라캉이 말한 실재계(the Real)의 침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라캉의 이론에서 실재계(the Real)는 상상계나 상징계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상상계는 동일시를 통한 자아 형성의 공간이며, 상징계는 언어와 규범을 통해 사회적 주체를 구조화하는 질서이다. 그러나 실재계는 이 모든 구조를 넘어선, 언어로 파악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것은 상징화되지 못한, 그러나 부재하지도 않는 끈질긴 흔적으로, 일상 속의 세계관이 붕괴될 때, 혹은 극심한 감정과 충격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상징계


나는 조금씩 이 세계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거다. 이건 그 첫걸음이다. 이걸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아마도 또 다른 무엇인가가 찾아올 것이다. 5)

장인은 하지메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었고, 사업이 번창하게 된 후에는 더 큰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자신의 지시대로 유령회사에 투자할 것을 권유한다. 장인은 하지메에게 돈과 명예를 제공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능한다. 그 힘은 주체에게 자신이 부여하는 법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거리낌 없이 남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초자아'의 기능이며, 라캉에게는 '상징계'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는 하지메에게 상징계의 질서를 강요하며 그를 사회적 주체로 편입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하지메는 자신의 욕망을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특히 유령회사 투자를 요구받는 순간, 하지메는 자신의 정체성과 꿈마저 타인의 의지에 의해 소모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상징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첫 충동이었고, 하지메는 더 이상 그러한 불법에 편승하지 않기로 결심하며, 시마모토와 함께 ‘국경의 남쪽’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은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원초적 지점—자아의 기원이자 욕망의 무의식이 깃든 장소—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이기도 했다.


시마모토의 등장은 하지메에게 바로 그 실재계의 침입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환상을 현실에 불러오면서도, 동시에 환상을 파괴하는 존재였다. 자신의 아이의 유해를 강에 뿌린 시마모토는, 이제 더 이상 중간의 타협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는 현실이 아니라 경계 그 너머에 있었고, 그 눈빛에서 하지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에 직면하게 된다.


시마모토는 그녀는 실재계의 화신처럼, 하지메를 그의 욕망의 구조와 직면하게 만들지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하지메를 남겨두고 단호히 떠난다. 이 만남은 환상이 깨지는 고통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하지메가 현실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욕망의 대상은 결코 소유되거나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것이며 결핍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결핍의 본래적 의미


환상은 더 이상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위해 꿈을 빚어내 주지 않았다. 공백은 어디까지나 공백 그대로였다. 6)


환상이란 현실을 떠받치는 심리적 구조물이다. 주체는 실재계의 위협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환상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의미 있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재계가 일상의 균열로 침입해 올 때, 환상은 붕괴하며 주체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공백과 맞닥뜨린다. 시마모토는 실재하는 인물인지 환상의 투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하지메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 실재의 흔적이자, 그가 억압해 왔던 욕망을 되돌려주는 파열의 매개로 등장한다.


결말부에서 작동하는 서사의 반전은 라캉이 분석했던 에드거 앨런 포의 '잃어버린 편지'의 구조와도 깊이 연결되는데, 라캉에 따르면 잃어버린 편지는 단순한 전달물 그 자체가 아니라, 타자의 욕망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어떻게 위치 짓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다. 편지는 실제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보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 바라보이고 있었는가가 중요하며, 결국 주체는 타인의 시선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하지메는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결말에서 드러나는 유키코의 시선은 그 환상을 조용히 무너뜨린다. 하지메는 유키코를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면 깊은 외로움이 그를 그녀에게 이끌었고, 유키코는 처음부터 그의 여정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고통을 감내하며 그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 고요한 응시는 마치 오랫동안 도달하지 못한 편지가 뜻밖의 순간에 전달된 것처럼, 하지메의 자기중심적 서사를 전복해 버린다.


결국 하지메는 깨닫게 된다. 결핍은 외부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기 안에 내재된 것이며, 그것은 충족을 통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의 의미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삶의 깊이를 부여한다는 것을.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려 했던 모든 시도와, 편협함에서 벗어나고자 애써온 수많은 노력들이 오히려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그 환상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고,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잃어버릴 수도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메는 이제, 자신을 사랑하고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작고 구체적인 현실을 하나하나 쌓아가기로 결심한다. 인간은 본래 결핍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라캉의 시선으로 하루키 문학 분석하기』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서론

하루키의 작품 세계: 판타지와 현실의 혼재

프로이트적 욕망 분석과 치유·구원의 가능성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독특한 위치


II. 상상계와 소외

하지메: 외동아이로서의 결핍과 사회적 편견

시마모토: 같은 외동이지만 신체적 결핍을 지닌 인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상상계 개념으로 관계 해석

하지메의 욕망과 죄책감, 소외의 시작


III. 기의와 기표, 결여

라캉: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됨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 → 의미의 불안정성

시마모토: 하지메의 ‘작은 대상 a’로서 결핍을 자극

이즈미: 상징계를 체현하는 인물, 사회적 규범과 가치의 대립


IV. 실재계

유키코와의 결혼: 안정된 일상과 사회적 성공

시마모토의 재등장: 환상과 충돌, 실재계의 침입

결핍의 무효화와 욕망 구조의 붕괴


V. 상징계

장인의 투자 요구: 사회적 질서와 부패한 경제 구조 반영

하지메: 상징계의 억압을 자각, 욕망의 소외 경험

시마모토: 환상을 파괴하는 실재계의 화신


VI. 결핍의 본래적 의미

환상의 붕괴와 실재계의 침입

라캉의 ‘잃어버린 편지’ 구조와 유키코의 시선

하지메: 결핍은 외부가 아닌 자기 내부에 본래적으로 존재함을 깨달음

결핍을 수용하며 현실을 살아가기로 결심



♧ 참고도서


< 국경의 남쪽과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22.01.14 >

1) 20p

2) 9p

3) 48p

4) 170p

5) 206p

6) 331p

7) 265p



&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은 단순히 특정 집단이나 세대의 문제라기보다,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페미니즘’과 ‘미러링’ 논쟁, 최근 ‘영포티’ 세대에 대한 비난은 모두 사회가 부분적인 이해 속에서 그것을 전부인 양 착각하며 갈등을 재생산하는 모습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을 은유한다. 우리는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그 불완전한 인식이 갈등을 낳는다.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된 이후 이미 이러한 현상을 경험했다. 경제적 풍요가 사라진 뒤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도피처를 찾아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싶어했다. ‘옴진리교’와 ‘통일교’ 같은 종교 집단은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어 사람들을 현혹하고 착취했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과 혼란은 일본이 이미 지나온 길과 닮아 있으며, 미래는 기정사실화된 듯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고,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는 ‘거짓 메시아’들이 판치고 있다. 그들의 말은 달콤하지만,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갈등과 분열만 조장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은 이러한 사회적 패턴을 구조화한 소설이다. 인물들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인격화한 존재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메에게 시마모토는 ‘에덴동산’ 같은 존재, 즉 이상적 자아와 욕망의 이데아를 형상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그녀와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서로에게 어색함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하지메는 시마모토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춘기 시절 만난 이즈미는 하지메의 욕망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상징계의 작동을 보여준다. 하지메가 일탈을 시도하는 행위는 제도권에 대한 반발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는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장인의 지속적인 간섭은 그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권위적이고 제멋대로인 가부장제에 대한 반항으로 읽힐 수 있다.


이때 다시 나타난 시마모토는 과거의 잔상으로서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실재계의 불안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하지메는 본능적으로 그녀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시마모토는 환상 속에서 욕망을 자극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균열을 드러내는 실재계의 화신이었다.


결국 하지메를 현실로 붙잡아 두었던 것은 유키코였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경험을 지닌 인물로, 남편의 방황을 묵묵히 지켜본다. 유키코의 존재는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메타포로 읽힌다. 그녀는 하지메에게 환상 속 도피가 아닌, 결핍을 인정하고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현실은 과거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 서야만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 비 내리던 밤 >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가엔 흐릿한 빛이 감돌고,

침묵 속에서 시간은 흐른다.


바람이 조용히 지나간다.

아쉬움을 남긴 채 손을 놓는다.

손끝에 스며들던 온기가 희미해진다.


곁에 있던 너는 이제 없다.

함께 듣던 음악은 멀어지고,

창밖 풍경도 빗물 속에 흐려진다.


발걸음을 떼고, 그 자리에 더는 머물지 않는다.

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흐릿한 색이 번지고 있다.




"태양의 서쪽에는 도대체 뭐가 있는데?"라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몰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몰라. 아니면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튼 그건 국경의 남쪽과는 좀 다른 곳이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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