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츠메 소세키, #그 후, #니체. #우상의 황혼
* 그는 참됨은 하늘의 길이라는 글귀 다음에, 사람의 길은 아니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1)
그러나 요즈음은 도금한 것은 금으로 믿게 하려고 이래저래 안타깝게 궁리를 짜내느니, 놋쇠를 놋쇠라고 밝히고 놋쇠에 던져지는 모멸을 참아내는 편이 마음 편할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2)
우리는 '옳은 것'을 택하며 살아간다. 사회가 규정하는 옳음. 부모가 원하는 삶, 도덕과 윤리가 가리키는 방향...
그것은 당신이 원한 것인가? 꼭 그랬어만 하는가?
언제가 무언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번은 당신을 찾아올 때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돌이키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가면 괜찮아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눈앞에서 무너뜨려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눈앞에 찾아오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을 한 후에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쓰메 소세키는 '그 후'라는 작품에서 그러한 내면의 첨예한 갈등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을 읽을 때만큼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사람이다. 니체의 『우상의 황혼』의 지문들을 정리하면서 ‘국가’, ‘개인’, ‘관습’, ‘감정’ 같은 키워드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소세키의 『그 후』에서는 주어진 위치와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자기 삶을 개척하려 한 주인공 다이스케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서 필자는 성격이 다른 텍스트 간에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접점들을 하나씩 연결하며 나름의 컨버전스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일본사회가 근대화 과정에서 겪고 있던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갈등을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기존의 가치들을 전복시켜 버렸고, 신체와 본능을 억압하는 이성 중심적인 세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가 겪게 되는 도덕과의 충돌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감정의 균열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겪을 수밖에 없는 내부의 전쟁이기도 하다.
니체는 과연 그런 상황에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우상들보다 오래되고 확신에 차있고 교만한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보다 더 속이 비어있는 우상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가장 많이 신봉된 우상이었다. 특히 우상으로서의 성격을 현저하게 갖고 있는 경우에 그것들은 결코 우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3)
그러니 맘 잡고 뭔가 해보도록 해라. 국민의 의무로써 말이야. 너도 벌써 서른 아니냐? 4)
소세키의 『마음』 속 인물들은 니체가 비판한 ‘약자’와 ‘노예의 도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그 후』의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과 기준보다 개인의 삶과 감정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통해 니체가 그린 이상적 인간상에 가까이 닿아 있는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비록 소세키가 니체의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니체가 기독교적 도덕과 서구 전통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졌듯이, 소세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급격한 서구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 그리고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기 내면의 가치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니체의 ‘초인’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부분들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근대 일본사회의 모순과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았고, 고상한 삶과 예술적인 취향을 추구하며 노동을 저열한 것으로 간주하며 "빵을 위한 삶은 인간으로서의 보람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직인 상태로 아버지의 재산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인물이다. 반면에 그와 대척점에 있는 친구 ‘히라오카’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다가 좌절하게 되면서 다이스케와 달리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둘 사이를 연결하는 제3의 인물 ‘스기누마’가 있고, 그는 ‘미치요’라는 여동생을 데리고 함께 살고 있었다.
대략적인 배경은 이 정도로 설명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이야기를 확장해 보기로 한다.
우상의 황혼, 누가 알겠는가? 그것 역시 아마도 일종의 '영혼의 평화'에 불가한 것인지를 5)
다이스케는 모든 도덕의 출발점은 사회적 사실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고정된 도덕관념을 가지고, 거기서 거꾸로 사회적 사실을 발전시키려 하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6)
다이스케는 철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상주의자이며, 자신의 내면을 고상한 가치로 정의하려 노력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삶은 본능과 감정보다는 도덕과 규범에 맞춰 설계된 것이었다. 그는 친구 히라오카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미치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억누르고, 당시 사회가 요구하던 ‘의리’라는 도덕적 원칙에 따라 두 사람의 결혼을 주선한다. 이 선택은 외적으로는 고상해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자신을 억누르고 진실된 삶을 외면한 자기기만에 가까웠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우리는 도덕을 저격해야만 한다"라고 선언하며, 기존의 도덕을 퇴락한 삶의 산물이라 비판한다. 다이스케가 따랐던 ‘도덕적 책임’은 바로 그런 병든 도덕의 명령 체계였고,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감정과 존재의 진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켜 버렸다.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의 전형적 모습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다이스케는 자신의 욕망과 자율성을 희생하며 사회적 기대에 순응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초인’은 기존의 가치와 도덕을 초월하여, 스스로의 기준을 창조하는 존재다. 그는 감정과 본능을 억누르는 이성 중심 세계에 맞서 저항하며, 자기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실존적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사회가 규정한 도덕적 기준에 얽매여 자기 삶의 창조 가능성을 외면했고, 순수한 감정을 억누른 채 학문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자기기만적인 반동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가장 눈부신 햇빛,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합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밝고, 냉철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본능이 결여되어 있으면서 본능에 저항하는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병, 또 하나의 병에 지나지 않았다. 7)
자네는 돈에 궁해 본 적이 없어서 문제야. 생활이 곤란하지 않으니까 일할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요컨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고상한 말만 늘어놓고..... 8)
히라오카는 다이스케와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을 얻기 위해 주저하지 않는다. 미치요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 결혼에 이르렀지만, 결혼 이후 아내의 병환과 유산이라는 삶의 고통을 직면하자, 도박과 외도를 통해 현실을 도피하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성공을 추구하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하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공허하며 자기 책임과 자제력이 결여되어 있다.
니체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히라오카는 욕망에 휘둘리는 반(半) 주체적 존재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면서도 그 결과를 감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초인이 지닌 창조성과 절제를 결여한, 자기 탐구 없는 인간상을 드러낸다.
그는 절친인 다이스케에게 빚을 얻어오도록 아내 미치요를 종용했고, 신문사에 입사한 이후에는 다이스케의 아버지의 비리에 관한 기사를 빌미로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보다 고급의 인간 유형은 '직업'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소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완전히 준비가 된' 인간이 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9)
저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을지 몰라요. 10)
스가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다이스케와 히라오카는 오빠의 자리를 대신해 미치요에게 애정을 느끼게 된다. 스기누마는 생전에 미치요가 다이스케와 이어지길 바랐고, 다이스케에게 동생의 예술 교육을 맡기기도 했다. 다이스케는 그 역할을 기꺼이 수락했고, 미치요 또한 그런 다이스케를 진심으로 따랐다.
그녀는 오빠의 친구들과 철학과 예술을 주제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지성과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던 수동적인 역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결혼이라는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솔직한 감정보다는 타인의 선택에 따르게 된다.
미치요는 히라오카와의 결혼생활 속에서 유산과 질병, 배우자의 외도와 경제적 몰락까지 감내해야 했으며,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이스케에 대한 애정과 미련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는데, 이는 그녀가 단지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참된 세계를 제거해 버렸다. 이제 무슨 세계가 남아있는가? 현상의 세계일까? 아니다. 참된 세계와 더불어 우리는 소위 현상의 세계도 없애버렸다. 11)
평소 다이스케는 만일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인간은 끝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금전상의 관계가 끊어지게 된다면 그는 싫어도 다이아몬드를 내던지고 감자에 매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는 자연으로서의 사랑만이 남을 뿐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남의 아내였다. 12)
미치요와 히라오카와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미치요는 다이스케에 대한 동경과 미련을 잊지 못했다. 그러다 미치요는 유산하게 되고, 심장병까지 앓게 되었다. 히라오카는 아내의 병으로 인해 빚을 지게 되었고, 도박과 외도로 스트레스를 표출하게 된다.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히라오카의 행태는 다이스케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럴수록 미치요에 대한 감정은 깊어져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스케는 가문의 이해와 경제적 안정이라는 명분 아래 결혼을 강요받게 되었고 더욱이, 자신이 가장 큰 가치를 두었던 ‘우정’과 ‘의리’마저 히라오카에게 도구처럼 악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실망을 느낀다. 동시에, 미치요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그녀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이스케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다.
최후의 것, 가장 희박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으로, 원인 그 자체로서, 가장 실재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13)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태어날 때 이미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14)
니체는 “우상은 가장 속이 빈 것들이며,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신봉되었다”라고 말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의 죽음과 히라오카의 몰락을 지켜보며, 자신을 규정해 온 도덕적 환상에서 점차 깨어난다. 그가 신봉해 왔던 ‘도덕’은 실체 없는 허상과 병든 우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예술과 철학이라는 고상한 가치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 했으나, 결국 그 삶은 ‘가문’, ‘의리’, 그리고 ‘도덕’이라는 외적 기준에 깊숙이 얽매여 있었고, 바로 그 우상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삶을 가로막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결단으로 이어진다. 다이스케는 지금껏 신봉해 온 모든 가치를 과감히 내려놓고, 남은 삶을 오로지 미치요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것은 그가 평생 외면해 왔던—‘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완성된 이상형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내면과 기존 가치 체계 사이의 충돌을 감내하고, 스스로를 재정립해 나가며 , 외부의 규범이나 타인의 기대가 아닌,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와 신념을 기반으로 삶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혼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다이스케의 결단은 바로 그 ‘초인의 탄생 조건’을 충족시키는 첫걸음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향한 깊은 선언이자, 삶을 전면적으로 재정립하는 실천적 각성이었다.
니체는 “진정한 체험에는 말이 결여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다이스케의 결단은 말 이상의 감정을 내포한 실존적인 응답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가장 진실한 대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자신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5)
『 우상의 황혼, 그 후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서문: 도금된 진실과 내면의 균열
II. 니체와 소세키: 시대를 넘어선 문제의식
III. 『그 후』의 인물과 니체 철학의 접점
III-1. 다이스케: 도덕의 우상과 감정의 억압
III-2. 히라오카: 욕망과 책임 사이의 균열
III-3. 미치요: 시대의 틈에서 감정을 품은 존재
IV. 갈등의 심화: 도덕, 사랑, 그리고 몰락
V. 우상의 붕괴: 다이스케의 각성과 결단
VI. 초인의 조건: 니체적 실존과 다이스케의 전환
© 참고문헌
< 나쓰메 소세키, 그 후 (윤상인 옮김), 민음사 2023.09.25. >
1) 43P
2) 99p
4) 146P
6) 146p
8) 106p
10) 288p
12) 229p
14) 180p
16) 350p
<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4.05.17. >
3) 10p
5) 59p
7) 38p
9) 93p
11) 53p
13) 44p
15) 2p
16) 350p
17) 113p
&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질 것 같은 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길 것 같은 쪽이 이기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쪽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면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솟구치고, 어느새 나는 그들을 응원하고 있다. 심지어 나는 부산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롯데’가 이기는 데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나는 본래 ‘언더독’ 기질이 짙고,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에 딴지를 걸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이런 태도는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직장생활에서도, 학창시절에도 나는 늘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었다. 판례나 다수설을 따르면 수월했을 과제에서도 굳이 충돌되는 학설을 찾아 비교하고 분석했다. 내가 납득하거나 소화하지 못한 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은, 아무리 그것이 내게 유익하다 해도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학창시절의 나는 주변 환경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어떤 계기를 통해 각성했고, 그 이후로는 나를 둘러싼 세계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몇 가지 답을 얻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지금도 내 안에는 알게 모르게 남은 억압의 잔재들이 있어, 내 사고와 행동을 검열하고 제약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떤 작품을 읽을 때, 그 안에서 무언가와 대립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이라 느낀다. 아무리 세상의 지혜가 농축된 고전이라 해도, 내가 공감할 수 없다면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우상의 황혼』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을 지닌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진정한 젊음이란 무엇인가”,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신분이 주는 전통과 의무의 무게에 점차 거부감을 느낀다. 마음에도 없는 여성과의 결혼을 강요받는 상황은 그가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가족과의 갈등을 감수한다. 그제야 다이스께는 집안의 지원 없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후』가 의미를 갖는 지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요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사랑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선언이었다.
근대 일본이 개항 이후 전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시기, 다이스께는 그 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 소세키는 이 과정을 통해 다가올 시대정신을 말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것은 국가나 전통을 넘어서, ‘개인의 자각’이라는 작고도 강력한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랐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기존의 가치, 전통, 도덕, 신념뿐 아니라, 보다 혁신적이고 개인적인 것조차도 모두 ‘우상’이 될 수 있다. 다수에게 받아들여지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나의 의식과 삶을 억압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흔들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면, 과거의 전통이 젊은이들을 억눌렀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제는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라는 새로운 우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청년’은 더 이상 혁명의 기치를 든 존재가 아니라, ‘우대’ 받아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진정한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여전히 우상에게 짓눌려 있다.
우상은 한 번 무너졌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우상이 무너진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이 들어서게 될 것이고, 또다시 그것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에게 삶을 끌려다니게 될 것이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각하고, 질문하고, 선택하는 존재로 남는 일이다.
악순환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순리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소세키의 소설을 읽는 매력은 간결한 문체로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작가가 독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스스로 사유할 여지를 남긴다는 데 있다.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소설은 결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형식에 머물던 탐미주의자 다이스께가 마침내,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질 것 같은 쪽’을 응원한다. 그것은 단지 패자의 편에 서겠다는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우상에 맞서 싸우는 자들의 본능적 연대다. 나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를 들이밀고, 다수의 논리를 의심하며, 내 안의 억압을 하나씩 걷어내려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믿고 싶다. 진정한 삶은, 진정한 젊음은, 바로 그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 AFTER >
그녀는
나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내 어둠을, 조용히 감쌌다.
곁에 있어서는
안 될 여인.
그 순간,
나는 너무나 옳았다.
살아야 할 이유,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나를 뚫고, 지나가버렸다.
도덕보다 오래된,
어떤 신념보다 선명한—
그 침묵 속에서
모든 우상이, 무너져갔다.
나는,
신을 부정한 자로,
그녀 앞에 서있다.
도덕 너머로
이제 가려한다.
기꺼이,
몰락하려 한다.
나는, 그 순간
가장 고귀한 예술을 원했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디오니소스를 목놓아, 불렀다.
전신주가 빨갰다. 빨간 페인트칠을 한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해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 16)
현실의 인간은 한갓 소망되고 꿈꾸어지고 새빨간 거짓말로 날조된 인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더 큰 가치를 갖는가? 이상적인 어떠한 인간과 비교해도 말이다.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