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초인#, 아모르파티#,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제목부터 뭔가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그 이름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읽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니체가 차용한 잠언의 상징적 의미를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문장의 형식들은 읽는 사람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는 추상적인 것을 경멸한다고 말했지만, 그 발언 자체가 이미 모순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순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며, 독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주기보다, 끊임없는 질문과 사유의 긴장을 유도하며, 어떤 경우에는 작품에 대한 오독과 왜곡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니체는 시작부터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를 도발적으로 선언한다. 이로 인해 여러 방면에서 지탄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한 무신론의 수준이 아니라, ‘신’ 중심의 가치체계가 전복된 상황에서 누가 그 자리를 재편하여 새로운 가치체계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초인(Übermensch)’이라 명명한 특별한 인간의 유형에서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초인은 단순히 강한 존재가 아니라, 기존의 도덕과 가치 체계를 넘어서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그는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이며, 니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만이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이 되는 길을 걸어왔는데, 그대들 내부의 많은 것들은 여전히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는데, 지금도 역시 인간은 그 어떤 원숭이가 원숭이인 것보다도 더 원숭이다. 2)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시간과 역사를 직선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하다. 그들에게 과거의 것들은 구식에 불과하며, 그것만을 고집하다 보면, 변하고 있는 세태와 모순과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잘못된 가치체계들을 전복시키고. 혁신과 노력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니체에게 역사는 단순한 진행의 기록이 아니라, 반복과 퇴행, 그리고 창조적인 파괴가 교차하는 살아있는 장이다.
역사의 발전 과정에는 진보적인 성향만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발전은 그것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과 부딪치게 될 때, 더욱 약동하는 특성이 있다. 반대로 그 장벽이 걷혀 대상이 사라져 버릴 때,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기보다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진보와 퇴행은 방향만 다를 뿐, 같은 에너지를 공유하고 있으며, 외관만 달리할 뿐 패턴은 반복되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했듯이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게 될 뿐이며,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생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어떤 것이 당연하게 주어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에도 없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내 앞에 서 있는 ‘적’이 그러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역사는 일정한 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인 측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힘의 의지’들이 서로 부딪치며 약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의 파동들이 어떠한 변곡점에서 발현되고 수렴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우리는 단지 그 흐름만 보고 대략적인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과의 대비 속에서는 상대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이러한 반복과 변곡의 개념을 한번 더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과 의지가 무한히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이 어떠한 가치를 창출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부터 먼저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선악을 구별하여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 자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악'도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것에 속할 수도 있다.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그러한 장벽을 뛰어넘는 기적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지적되던 본능과 이기심 같은 것들이 오히려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니체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이러한 ‘의지’에서 찾았으며, 이기심과 충동조차도 창조적 삶을 위한 원천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전제도 없이 니체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의 혁신적인 사상과 파격적인 문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기만의 잣대로 잘못 읽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를 무신론자, 성차별주의자, 정신병자, 파시스트, 국수주의자 등의 범주로 국한하려 하지만, 그러기엔 니체의 사상은 너무 위대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기 위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을 '망치를 든 철학'이라 부르며, 도발을 유도했다.
니체는 초인사상은 일제 강점기 젊은 지식인들에게 저항과 자기 초월의 상징으로 작용했고, 그가 강조했던 ‘민족’이라는 이상향은 죽음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분투했던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니체의 철학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삶의 방식이었으며, 그 점에서 그는 철학자이자 혁명가였고, '청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니체를 읽어야 한다.
그대는 여자들에게 가려는 거요? 그렇다면 회초리를 잊지 마시오. 3)
박홍규는 '니체는 틀렸다'라는 저서에서 니체를 독재정권과 연결시키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비판을 쏟아낸다. 그러나 이는 철학적 맥락과 시대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사상을 단편적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이유는 분명하다. 자료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닌 다층적 의미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한 채 ‘틀렸다’는 단정만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악의 저편'을 읽다 보면 자극적인 표현들이 많아 그런 비난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사실 니체 철학은 종잡을 수 없다는 점 자체가 특징이고, 그의 사유는 고정된 틀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도약한다. 하지만 이후에 출간된 '도덕의 계보'에서는 보다 정제된 문체와 논리적 구성으로, 니체가 자신의 표현을 의식하고 다듬었음을 짐작하는 요소도 있다.
죽기 전 정신착란이 심화되면서 그의 언어는 더욱 파편화되고 격정적으로 변해갔지만, 이는 단순한 병리적 현상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모순적 존재가 지닌 본질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것은 진실한 내면의 고백이며, 니체는 그럴싸한 포장을 덧씌우기보다는 여과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자 했다.
니체는 박홍규가 지적한 만큼의 극단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진실에 가깝다. 그의 사상은 상대적이고 개방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독일인이었지만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고, 독일을 비판하며 프랑스를 이상향으로 제시한 적도 있다. 유대인이나 여성을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옹호한 적도 있으며, 그의 사상은 상대적이고 개방적인 특징을 지닌다. 강경한 어조와 편향적인 인상은 개인의 성향과 글쓰기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문맥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니체는 개인과 집단 간의 긴장관계를 전제하여 사상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자유'였다.
그렇게 때문에 박홍규와 같은 해석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자신이 극단주의자이기 때문에 그 시선에서만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겨진다. 사회주의의 핵심은 기존 구조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세우는 데 있지만, 그 이상은 번번이 ‘민족’이라는 감정적이고 배타적인 개념 앞에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노동자들은 계급보다 민족을 우선시하며 전쟁에 참여했고, 이는 국제주의적 연대라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박홍규가 니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이유는, 사회주의의 틀 안에 니체를 가두어 '민족'의 개념을 격하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이 이기적이고 기득권 중심의 논리를 강화하는 도구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는 종종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되며, 내부의 불평등을 가리는 장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은 놀라운 응집력을 발휘하며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힘을 지닌다. 전쟁이나 외세 침략 같은 위기 상황에서 민족적 정체성은 개인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결속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니체는 그러한 집단적 동일성보다는 개인의 초월과 정신적 성장에 더 큰 가치를 두었고, 그가 강조하는 민족의 개념은 이러한 개인들이 모여 형성된 고차원적 공동체라는 측면에서 박홍규의 비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니체는 진리를 여성에 빗대어 표현했다. 진리가 형식에 안주하지 않으려면, 가장 작은 것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사용한 ‘채찍’이라는 비유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경계와 긴장을 상징하는 장치였다. 진리는 유혹적이며, 때로는 스스로를 우상화하려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끊임없는 의심과 해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니체를 단순히 비판하기보다는, 그의 철학을 재조명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으며, ‘주체의 전환’은 그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여성이 주체가 되면 남성이, 소수자가 주체가 되면 다수자가, 이방인이 주체가 되면 민족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니체의 사상이 단순한 권력 비판을 넘어 구조적 전복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성별이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비판의 대상 역시 이동한다는 통찰이다. 따라서 니체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텍스트 구조를 분석하고 전체 맥락과 비교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며, 결국 ‘민족’이라는 개념은 억압과 해방, 배타성과 연대 사이에서 복잡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복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시각에서만 비판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진단한다는 측면에서 박홍규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시도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울은 반대 방향을 비추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이비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언제나 특정한 사상과 복음을 제시하고 어떤 ‘귀한 인간’을 믿으라고 사람들을 기망해 왔고, 그러기 전까지는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우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귀인'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장을 바꿔버리고 또 다른 계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선과 악, 종교와 사상, 진보와 보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우상은 형태만 바뀌었고, 과학의 시대의 도래 이후에도 그 망령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그것을 보고 있는 차라스트라에게는 헛웃음만 더해질 뿐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정점에 이른 인간에게도 스스로를 경멸하고 몰락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 자리에 머무르는 순간, 차라투스트라 자신도 타파되어야 할 새로운 우상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속성이며, 진리 또한 부딪치고 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형식적인 개념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깨어있기 위해서는 항상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대들의 정신 속에는 온갖 시대들이 서로 어긋나는 말로 떠들어 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꿈과 떠들어댐이 그래도 그대들의 깨어있는 상태보다는 더 현실적이었다. 4)
이 문장은 오늘날 인권 교육 현장에서 마주치는 풍경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묘사한다. 인권 관련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억지 논리를 갖다 붙이며 작품을 비난하는 강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고전의 문장을 단편적으로 인용하고, 시대적 맥락이나 철학적 깊이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주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한다. 그러나 고전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사유의 깊이를 요구하는 철학적 유산이다.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을 시도하는 것은 결국 자기 성찰 없는 언어의 남용에 불과하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서양철학보다 동양사상이 더 인권적인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한다. 동양이 서양보다 인권적이었다고? 그들의 억지 논리에 할 말을 잃는다. 물론 동양사상에도 인간 존엄과 공동체 윤리를 강조하는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현대적 인권 개념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며, 맥락 없이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지에 가깝다. 유교의 효(孝)는 가족 중심의 질서를 강조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현대 인권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양의 자연권 사상은 신의 뜻에 따라 주어진 것에서 시작되어, 인간은 이성에 따라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할 권리를 가지게 되며, 개인이 직접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면서 개인의 양심과 자유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을 통해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를 구성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헌법과 인권선언을 통해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가치보다 인권이 우위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자식이 부모를 낳았다는 소리만큼 황당하게 느꼈다. 헌법은 단순한 법률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합의한 삶의 방식이며,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법의 위계를 설정하며, 모든 법률과 정책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인권은 그 헌법적 틀 안에서 실현되고 보호받는 것이지, 헌법을 초월해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헌법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 억압과 저항, 독재와 해방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헌법은 단순한 규범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투쟁으로 쌓아 올린 집단적 약속이다. 따라서 헌법을 경시하거나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그 구조를 무시하는 태도는, 결국 그 약속을 파기하는 것이며, 공동체의 안정성과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헌법이 민주공화국을 지향하기 때문에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질 수 있고, 인권은 그러한 이들이 인간으로서 지켜져야 할 기본적 권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인권주의자들이 헌법을 맹렬히 비판하는 태도는 전국시대 맹자가 묵가를 경계했던 구조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맹자는 묵가의 겸애와 상동이 유가적 질서—가족 중심의 도덕과 예(禮), 효(孝)—를 해체하고,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공동체의 유대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그는 묵가가 단순한 철학 집단이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개입과 조직적 행동을 통해 권력의지를 드러낸 점에서 더욱 경계심을 가졌다. 이상주의가 현실을 무시하고 제도적 균형을 흔들 때, 맹자는 그것이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맹자가 묵가의 이상주의를 경계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우리는 인권과 헌법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우열로 보지 말고, 상호 내포된 구조로 이해하며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인권을 강조하려면 헌법을 이해해야 하고, 헌법을 옹호하려면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완성하는 관계다. 이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 우리는 이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현실의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철학은 비교가 아니라 이해를 요구한다. 동서양 사상의 우열을 따지기보다, 각각의 사유가 어떤 역사적 조건과 인간 이해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 먼저다. 인권을 말하려면 먼저 사유해야 한다. 고전을 인용하려면 먼저 그 깊이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언어는 인권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무지를 재생산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 가장 이상적인 체제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결여된 사람들에게까지 동일한 수준의 평등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평등은 이상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맥락 없이 적용될 때 오히려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이른바 ‘천민 민주주의’는 독재주의보다 더 위험할 수 있으며, 플라톤이 '국가'를 집필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다수의 무지가 어떻게 정의를 압살 할 수 있는지를 경험했고, 그 해법을 ‘스파르타’의 강인한 정신에서 찾으려 했다. 물론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크세노폰조차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묘사하며 강력한 리더십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는 단순한 권위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와 책임을 강조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였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가치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가 내포한 모순을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단순한 참여나 권리의 요구만으로는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없다. 자유는 책임과 함께 작동해야 하며, 평등은 성찰과 분별을 통해 조화롭게 실현되어야 한다. 결국 민주주의는 제도 이전에, 사유하는 시민들의 정신적 토대 위에서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공화국은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이 조화를 이루는 국가를 지향한다. 그 차이는 때로 갈등을 낳지만, 동시에 발전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물론 차이가 차별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는 평등이 과연 진정한 평등인가? 평등은 단순한 균등 분배가 아니라, 각자의 능력과 책임에 기반한 조화로운 구조여야 한다.
설마 집단농장 같은 개념을 거론하고자 한 발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 속에서는 발전적인 대안이나 철학적 성찰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차이를 지우려는 태도 속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공동체의 역동성을 저해할 위험이 현저히 보일 뿐이다.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옳고 그름을 가려 잘못을 따진다’는 것이다. 만약 ‘비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먼저 책을 제대로 소화하고 충분히 사유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자신의 평판을 지키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비판은 지적이 아니라 책임이며, 사유 없는 비판은 단지 소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핑계를 대고 트집 잡는 것 외에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 소신껏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까지 싸잡아, 근거 없는 잣대로 비하하지 말아 달라. 당신들의 수준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비판은 타인을 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다.
민주주의는 감정이 아닌 사유로, 평등은 무분별한 균등히 아닌 책임과 능력의 조화로 실현되어야 한다. 고전은 그 길을 안내하는 등불이며, 우리는 그 빛을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볼 책임이 있다. 그것이 불편한 진실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포장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을 덮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유 없는 미화는 진실을 배반할 뿐이다.
오,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새로운 귀족으로 임명하고 그 길을 제시한다. 그대들은 미래를 나는 자, 미래를 기르는 자, 미래의 씨를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5)
선악의 귀추나 성공의 여부는 사실 우주의 광대한 역사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며, 그러한 기준에 짓눌려 살아간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던 개인이 대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포용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더 이상 삶은 인간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체념적 부정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 의지이다.
니체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관조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고귀한 자만이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민족까지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개념 때문에 그의 철학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대표적인 오독에 불과하다.
국가라는 집단은 본질적으로 민족의 창조적 특성을 약화시키고, 이를 지배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 제국주의는 결국 계급과 사회를 고착화시키며, 힘에의 의지를 그 지점에서 멈춰 서게 만든다. 달이 차면 기울 수밖에 없듯이, 권력은 정점에서 쇠락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민족은 국가의 범주로 확장된 집단이 아니라, 자기 극복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는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
니체가 이상적으로 그렸던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발전하는 그리스 민족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정복했을 때 제국의 조짐이 나타났고, 민족의 장점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의 통일 이후 페르시아 문화가 그리스에 침투하면서 그는 신격화되었고, 사후에는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통해, 민족이 제국으로 변질될 때 그 고유한 생명력과 창조성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니체는 실제로 국가를 '가장 냉혹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니체 철학의 핵심을 ‘초인’ 사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초인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초석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더 부합한다. 그는 초인을 신처럼 떠받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초인조차도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신이 사라진 사회에서 인간은 방향을 잃고 방황하지만, 니체는 그 혼란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찾아가기를 원했다. 초인은 그 가능성을 여는 존재이며, 고정된 진리나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연단하고 넘어서려는 실존적 태도다.
마키아벨리가 탁월한 능력을 갖춘 군주가 무너진 공화국을 재건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니체도 위대한 초인이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말한 초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고 내면의 혼돈을 질서로 전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초인은 체제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체제를 넘어서는 자이며,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는 자가 아니라, 민족을 새롭게 창조하는 자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가 자신의 철학 정수를 담은 책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삶과 고뇌를 고려하지 않고, 앞서 말한 내용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 책은 매우 위험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민족’ 개념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통치 도구로 사용했던 역사적 사실은 그 위험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들은 군장에 이 책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니체의 사상이 다윈의 진화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선’ 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 선과는 다르다. 자연의 관점에서 ‘선’이란 시스템이 가장 원활하게 작동하는 상태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악’에 가깝다. 따라서 니체를 피상적으로 해석하거나, 다른 언어로 희석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그것은 그의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뜻을 왜곡하는 무리에 지나지 않는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심연으로 끌어내려, 불순물을 녹이고 순수한 존재로 연단하는 과정이다. 그의 철학은 고정된 진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틀을 해체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현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악마를 보았을 때, 그가 심각하고, 철저하고, 심오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무거운 정신'이었다. 6)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 교의 창시자로서 선과 악의 대립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불을 숭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종교의 교리를 확립하고, 철학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니체의 책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해체해 버린다. 그는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기존의 관념과 자신이 직접 구축한 개념까지도 불에 살라버리고, 스스로 몰락을 자처하는, 존재 자체가 역설이고 모순적인 인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섭리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간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힘이 그 지위를 대신하며,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은 세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행보로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언젠가 때가 되면 진정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그들은 그저 제분기처럼, 맷돌처럼 같은 행위만을 반복하며 일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과 진보라는 가치도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들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가오게 될 시간의 종착점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때가 오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증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자신들의 운명을 알면서도 하늘을 들먹이면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게 되는데, 심지어 진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므로 시간의 경과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될 수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한계는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며, 어느 순간부터 순간과 영원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리고 대지에 뿌리를 두지 않는 종교와 학문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며,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두발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고, 높은 긍지를 느끼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삶의 무게들은 오히려 그들을 중력의 영에 짓눌리게 만들고, 자신들을 타인의 지배와 복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결국,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게를 버텨낼 수 있는 신체와 건강이다. 그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만 하는데 대개는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거나, 그 위치에서 도태되는 것을 두려워만 하다가 때가 다가오면,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
남의 짐을 지기만 하던 낙타는 반복만 되던 삶에 의심하게 품게 될 때, 사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강요되던 모든 가치에 대해 저항하고,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사자의 한계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바로, 혁명의 발현 단계가 그러하다. 그런데, 대개는 그 의도와는 달리 미완의 상태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들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 사라져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그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방향 없이 미적대다 보면, 결국 자신들도 저들처럼 타락하거나,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다시 타도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혁명의 기분에만 취해 있을 뿐, 삶의 무게는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기에, 그 짐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려는 습성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오해되기 쉬운 구조 속에서, 책임 없는 권리 요구가 반복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유를 외치지만, 그 자유가 수반하는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그 평등이 요구하는 성찰과 조화를 외면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권리의 과잉과 책임의 결핍 사이에서 균형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현상을 ‘인지부조화’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가치와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외면하려는 심리적 경향이다. 혁명 이후의 공허, 민주주의 내부의 모순,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오해는 모두 이 인지부조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국, 진정한 해방은 외부의 억압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무게를 직시하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그 자체로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생겨났던 고뇌와 딜레마, 그로 인한 숱한 시도들이 끝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혁명이 겪어왔던 여정을 도외시하고, 자신들을 선이라고 부르며 과실을 취하려 하면서도, 정작 그 길에 들어서게 될 때는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권리만을 주장하고 있다. 권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자들은 다시 낙타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스스로 가치를 만들지 못하면서 시기와 질투만 하는 그러한 인간군상들을 니체는 ' last man' 즉, 종말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항상 깨달은 자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왔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에게는 그 모든 것들은 영원회귀에 부수되는 것들에 불과하며, 다만 그는 그러한 소란들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진리를 묵상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 그렇지 않으면 전혀 살지 않는 것', 그것을 나는 원하며, 최고의 성자도 그러기를 원한다. 그러나 슬프다! 어찌 나는 아직도 욕망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7)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참을 수 없는 것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 짐들을 던져버리고 자신을 존재로서 인식하며 스스로 가볍게 춤출 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그러한 단계에 머물 수 있는 인간을 ‘아이’에 비유했다. 아이는 순간이 만족되지 않으면 영원을 잃은 듯 슬퍼하고, 가장 이기적인 만큼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다. 그러나 그 충실함은 삶에 대한 본능적 긍정이며,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아이처럼, 육체의 리듬과 감각을 존중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은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서 다양성을 내포하며, 영혼보다 더 넓은 범주의 이성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이성은 머리로만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사유하는 것이다. 그는 전통 철학이 육체를 단지 영혼의 수단이나 감옥으로 여긴 데 반기를 들며, 오히려 육체야말로 인간 존재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감각과 본능, 욕망과 리듬은 단순한 생물학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들은 삶을 긍정하고 창조하는 철학적 에너지이며,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솟아오르는 생명력의 표현이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쾌락, 충동과 리듬은 단순한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된다.
진정한 사유는 추상적 개념의 조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과 고통, 쾌락과 투쟁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책상 위에서 도출된 논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이 겪는 경험과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영혼보다 더 넓은 범주이며, 육체와 감각을 포함한 존재 전체의 역동적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이러한 이성은 고정된 진리를 향한 도약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고 재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니체에게 철학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 창조는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춤추는 자의 귀는 그의 발가락에 달린 것이다. 8)
혼돈, 그 자체에서 우주는 에너지를 발산시켜 별을 만들고, 인간은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채 다시 태어난다. 저 은밀한 자정이 위대한 정오로 전환되는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축이 붕괴되고, 선과 악이라는 범주도 사라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세계는 다시 갈등과 균형 속으로 회귀하고, 역사는 또다시 시작된다.
이제 아이로 거듭난 인간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운명의 부메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놀이로 받아들이며, 무한히 확장되는 가능성의 향연 속으로 들어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되고, 삶이 어떤 결과를 주든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타인의 잣대는 더 이상 구속이 될 수 없으며, 우리는 자기 삶에 신성한 명분을 부여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것들을 ‘운명’이라 부르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삶은 역동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흥겹게 춤을 추면 되는 것이다.
♧ 참고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부북스, 2012.11.02>
1) 17
2) 17
3) 108
4) 191
5) 321
6) 65
7) 431
8) 356
9) 508
<니체는 틀렸다, 박홍규, 푸른 들녘, 2022.10.27>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고 모든 것이 서로 사슬에 매이고, 실에 묶이고 사랑에 빠져있는 오, 이런 세계를 그대들은 사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고통에게도 말하라. "사라져 버려라, 그러나 돌아오라!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하니까"라고 9)
< 축제 >
꿈꾸지 말지어다.
어차피 망상인 것을,
스러져갈 것을 위해 살지 말라.
간신히 꽃을 피우더라도,
비 한번 몰아치면 그만이다.
누가 감히 영원을 논하는가?
같은 꿈은 같은 삶을 박제할 뿐
청춘은 생각만큼 푸르지 아니하고,
우리네 삶도 그렇게 아름답지 아니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나아갈 뿐,
잠시라도 이 생을 멈춰 세울 자 없으리로다.
거친 바다의 향연, 그것이 바로 청춘
심연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생의 감각
이성이 숨죽이고 무지가 지혜가 되는도다.
그것을 온몸으로 찬양하라!
그것을 정면으로 맞이하라!
살아있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근본 모르는 진주로 장식되기보다
사연 많은 처절한 고통을 택하리라!
보이지 않는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하얗게 일렁이는 거품 속에 던져라!
그러하다. 젊은이들이여,
모든 허울을 벗어던지고 미친 듯이 춤추자!
손에 손잡아 어우러지며 서로에게 마주하자!
더욱더 크게, 점점 다가가,
세상이란 괴물을 생포하라!
지옥도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천국이 오는 법
타다 남은 재속에서 생은 다시 부화하는 도다.
결국 깨닫게 되리라!
삶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을
어디서든, 어떻게든 시작되고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