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존재

by 비루투스

방 안은 나왔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비는 언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을까?


옷이 젖어버린 채, 문득 드는 떤 생각
이제는 그것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

그렇게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긴 여행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지만,

목적지에 가기 전까지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단단히 묶고 또 묶어서 어디엔가에 두는 일

비는 다시 내리고,
코끝에 전해지는 젖은 나뭇잎 냄새



방 안은 나왔을 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은 조용한 문장 속에 깊은 감정의 파동을 담고 있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 없는 공간이지만, 그 안을 지나온 마음은 이미 젖어 있다. “비는 언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을까?”라는 문장은 단순한 날씨의 묘사가 아니라, 감정이 시작된 시점을 되짚는 자각의 순간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감정이 시작된 시점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 속 화자는 무언가를 잃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제는 그것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이라는 문장은 상실의 무게를 담담하게 전한다. 이 상실은 슬픔이라기보다, 자각의 형태로 존재한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그저 느껴진다.


“그렇게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목적 없는 여정의 철학적 울림을 준다. 우리는 종종 어떤 감정을 정리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긴 여행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코끝에 전해지는 젖은 나뭇잎 냄새”는 감정의 끝자락을 감각으로 환기시킨다. 말보다 냄새가 먼저 기억을 불러오고, 감정을 되살린다. 이처럼 시는 감정의 개념화가 아닌 감각화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단단히 묶고 또 묶어서 어디엔가에 두는 일”뿐이다. 그것은 기억을 정리하는 방식이자, 잊지 않기 위한 애틋한 노력이다.

이 시는 말보다 여백이 많은 작품이다. 독자는 그 여백을 채우며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벽에 쓰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