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편집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by 비루투스

* 우리는 정말로 여전히 삶을 사랑할까? 이런 질문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아마 많은 사람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이유가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1)


인간소외

시민계급은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적 동인을 알지 못하고, 시장경제에서 경제 발전을 결정하는 세력을 파악하지 못하기에 그것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2)


코로나 이후 전쟁은 장기화되고, 금리는 계속 오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더욱 급박해지고, 요구되는 조건은 점점 까다로워진다. 한국 사람들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또 있을까. 예전에 알던 한 조선족은 “한국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족쇄를 차고 나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이 점점 확신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경제적 불안이나 정치적 위기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압박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규범과 기준을 ‘상징적 폭력’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것을 내면화한 채, 마치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살아가지만, 실은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평가받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프롬이 생전에 산업자본주의와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사물은 점점 인간을 닮아가고 있지만, 인간은 오히려 사물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원자화되고 있으며,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기능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이 존재의 방식이 아닌 소유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자기를 잃어버린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더 많이 갖기 위해 살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연결하는 능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더 이상 관계 속 존재가 아니라, 교환가치로 평가되는 사물처럼 기능화되고 있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인간을 샅샅이 분해해 놓고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인간을 영장류의 한 종류로 보며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그들과 분명히 다르다. 동물은 적합한 서식지에 머무르며 환경에 순응하지만, 인간은 환경을 바꾸어나가는 능력을 지닌다. 그것이 바로 창조성이다.


창조성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3)


이 창조성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행동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재구성하며,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창조성은 인간에게만 허용된 능력이며,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역사를 이끌어왔고 문명을 만들어왔다. 논리적으로 사회가 발전하면 삶이 더 나아져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괴로워하는 걸까.


프롬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내면적 성장과 반드시 연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계는 진보했지만 인간은 더 외로워졌다”라고 말하며,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누리지만, 더 깊은 고립 속에 살아간다.


물론 시대를 잘 타고나 자신의 위치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창조성을 억압받고 주어진 조건에만 순응하다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무시당하거나 사회에서 배제된다. 창조성은 단지 예술적 재능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을 연결하고 합성하는 능력이다. 사랑도 그 창조성의 또 다른 유형이다.


프롬은 사랑을 ‘창조적 결합의 힘’으로 보았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하는 능동적 행위다. 창조성은 관계를 맺고, 의미를 구성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러한 창조성을 억누르고 있다.


도구적 인간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4)

산업자본주의 시대는 시스템적인 분업을 필요로 하고, 그에 맞는 인간군을 양성하려 한다. 사람들은 그러한 틀에 억지로 자신을 끼워 맞추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그리고 필요가 없어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될까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는 프롬이 말한 ‘도구적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평가하며, 필요에 따라 대체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미셸 푸코는 현대 사회가 ‘규율 권력’을 통해 개인을 표준화하고, 기준에 맞지 않는 존재를 배제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틀에 맞춰 살아가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



이러한 인간의 기능화는 결국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프롬은 이 단절을 회복할 수 있는 힘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에로스가 아니라, 자기애에서 출발하며 희생보다는 상생에 가깝다. 자기애는 이기심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능력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타인의 잣대에 자신을 들이밀며,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불행한 것이다.

이는 프롬이 말한 ‘자기 소외’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삶은 자기를 잃는 삶이며, 이는 불행의 근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이해에서 출발하며, 그 이해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의 조건이 된다.


행복의 조건

자유란 강제 없이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삶의 강요에 따른다면 그 사랑의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다. 5)


나는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방향을 설정하고, 스스로의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향이 타인과 사회와도 연결될 수 있다면, 그동안의 방황은 분명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존재를 규정한다”라고 말했으며, 프롬 역시 인간의 자유는 ‘자기실현의 능력’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을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사회와 연결되는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삶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세우고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외부 세계와 대화하며, 사랑과 창조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다움의 회복이며, 소외를 넘어서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자기 삶에 대해 진실하게 질문하고 책임져야 한다.

내면의 창조적 힘을 발견하고 실현해야 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연대를 형성하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원칙과 방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그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가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질문의 시작
- 삶을 사랑하는가?
-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 동기는 삶에 대한 애정일 수 있다.

II. 인간 소외
- 시민은 자신의 행동 동기를 모르고, 경제 구조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 한국 사회는 과도한 경쟁과 압박 속에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다.
- 부르디외: 사회 규범은 ‘상징적 폭력’이다.
- 프롬: 인간은 기능화되고, 관계보다 소유에 집착하며 자기를 잃는다.

III. 창조성
- 창조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다.
- 아렌트: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하는 존재’다.
- 프롬: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은 더 외로워졌다.
- 창조성은 예술뿐 아니라 관계, 사랑, 의미 구성의 능력이다.

IV. 도구적 인간
- 자본주의는 인간을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평가한다.
- 푸코: 규율 권력은 인간을 표준화하고 배제한다.
- 프롬: 사랑은 자기애에서 시작되며, 자기 이해가 타인 사랑의 조건이다.
- 타인의 기준에 맞추는 삶은 자기 소외를 낳는다.

V. 행복과 자유
- 자유란 강제 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사르트르: 인간은 선택으로 존재를 규정한다.
- 프롬: 자유는 자기실현의 능력이다.
- 행복은 자기 기준을 세우고, 사회와 연결되는 방향을 찾는 데 있다.

VI. 삶을 사랑하는 실천
- 삶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 질문을 멈추지 않고, 내면과 타인, 사회와 연결되어야 한다.
- 해답은 책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 참고도서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장혜경 옮김, 김영사, 2022. 02. 11 >


1) 23p
2) 187p
3) 131p
4) 55p
5) 241p
6) 44p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 첫걸음을 뗀 후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맞는 의미 있는 해답을 이런저런 책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 안에 있을 것이다. 6)


< 별로 보탬은 안 되겠지만 >


온전히 살아가려면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들,

그래서 그렇게 애썼는데

아직도 잡히지 않는 걸까.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다시 시작해야 할까.

벌써 이만큼 지나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이룩한 것에 만족을 배우는 것.


어쩌면 그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었는지도


같은 것을 보면서도

매일 새롭게 느끼고

조금씩 더 나아가며 ,


무언가 보태다 보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 되지 않을까.


누가 뭐라하건 말건

내가 알아주면 되지


시간을 지키는 것,

하루를 버티는 것,

루틴을 새기는 것.


단조로움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서,


어제를 오늘로,

오늘을 내일로.


지금의 순간을 보태가는 것

오늘의 하루를 기념하는 것

다가올 내일을 기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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