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스티븐 시걸처럼
긴 머리를 질끈 묶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선글라스에 깔깔이를
왼손엔 파 한다발
오른손엔 아메리카노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거친 보도를 가로지른다
휘익—
현실을 타고 미끄러지는
철학자의 탈권위적 선언
도시의 리듬을
예술로 바꾸는
그대는 진정한
‘간지’ 그 자체!
— 존재는 어떻게 간지날수 있는가
현대 사회에서 ‘간지’는 단순한 멋을 넘어선 하나의 문화적 코드이자 정체성의 표현이다. 시 「간지와 시간」은 이 대중적 개념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켜, 도시 속 개인의 존재 방식과 철학적 태도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이 시는 외양의 묘사를 넘어, 일상과 예술, 철학과 유머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주체의 형상을 제시한다.
시의 화자는 한 인물을 묘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티븐 시걸처럼 / 긴 머리를 질끈 묶고”라는 첫 연은 단순한 외모의 묘사를 넘어, 90년대 액션 스타의 상징성과 무심한 카리스마를 호출한다. 이는 단지 누군가를 닮았다는 의미를 넘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관철하는 존재로서의 인물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 선글라스에 깔깔이를”이라는 표현은 꾸미지 않은 듯한 멋, 즉 ‘간지’의 핵심을 드러낸다. 깔깔이라는 군용 점퍼는 실용성과 반항성을 동시에 상징하며, 이 인물의 태도가 단순한 패션이 아닌 삶의 방식임을 암시한다.
시의 중심부에서는 이 인물의 행동과 소지품이 대조적으로 제시된다. “왼손엔 파 한다발 / 오른손엔 아메리카노”라는 구절은 전통적이고 소박한 ‘파’와 도시적이고 세련된 ‘아메리카노’의 병치를 통해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충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이는 시가 단순한 멋의 나열이 아니라, 현대인의 복합적 정체성과 감각의 혼종성을 드러내는 장치임을 보여준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 거친 보도를 가로지른다”는 구절은 이 인물의 역동성과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스케이트보드는 속도와 반항, 유동성의 상징이며, ‘거친 보도’는 현실의 장애물이나 사회적 제약을 은유한다. 이 장면은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과 탈피, 그리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휘익—”이라는 의성어는 이러한 움직임에 청각적 리듬을 부여하며, 시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전환점 역할을 한다.
시의 후반부는 이 인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낸다. “현실을 타고 미끄러지는 / 철학자의 탈권위적 선언”이라는 표현은, 이 인물이 단순한 멋쟁이가 아니라 기존의 권위와 위계를 해체하는 철학자임을 선언한다. 그는 도시의 리듬을 예술로 바꾸며, 일상 속에서 철학을 실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지식과 예술의 일상화, 철학의 대중화, 그리고 자기표현의 자유라는 현대적 가치를 함축한다.
마지막 연의 “그대는 진정한 / ‘간지’ 그 자체!”는 시 전체의 정서를 응축한 선언이다. 이 문장은 단순한 찬양을 넘어, 자기 철학과 태도를 관철하는 존재 방식으로서의 ‘간지’를 재정의한다. 이는 외양의 멋을 넘어서, 삶의 태도와 미학적 실천으로서의 간지를 제시하는 시의 핵심 메시지다.
결국 「간지와 시간」은 현대 도시인의 정체성과 미학, 철학적 태도를 유쾌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시는 대중문화의 언어를 빌려, 예술과 철학, 유머와 일상이 교차하는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조한다. 이 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만의 ‘간지’는 무엇인가.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다.
“존재는 어떻게 간지날 수 있는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간지’는 단순한 외형이나 유행어가 아니다. 간지는 누군가가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곧 드러남의 태도다. 하이데거가 말한 ‘드러남(Erscheinen)’이나 ‘현존재(Dasein)’의 문제는 결국 존재가 어떻게 세계에 나타나는가를 묻는다. 그렇다면 간지는 존재가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양상, 즉 존재의 미학적 실천으로 읽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 불렀다. 현존재는 언제나 ‘던져져 있음(Geworfenheit)’ 속에 있으며, 세계-내-존재로서 끊임없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우리의 일상은 출근길 지하철의 무표정한 얼굴들, 손에 든 아메리카노, 스마트폰 알림과 소셜 피드, 전동 킥보드와 배달 오토바이의 경적, 네온사인과 편의점의 24시간 불빛 같은 사물과 장면들로 가득하다.
한 존재자가 있다. 그는 무표정한 군중 사이를 지나고, 편의점 앞 파 한 다발을 스쳐 지나며, 손에는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다. 그런데 그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거친 보도를 가로지르는 순간, 그의 ‘던져짐’은 다른 양상으로 전환된다. 그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세계에 휩쓸리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의 표면을 타고 흐르며, 자신의 존재를 스타일로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이 전환은 단순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과 결단의 순간, 존재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에 응답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성을 존재의 본질로 보았다. 인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연속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간지는 이 연속을 찰나의 강렬함으로 압축한다. 한순간의 움직임이 과거와 미래의 맥락을 끊고, ‘지금-여기(Jetztzeit)’의 충만함을 드러낸다.
“휘익—” 이 의성어는 바로 그 찰나를 소리로 포착한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존재의 드러남이 응축되는 순간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한 문장들은 때로 권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려던 핵심은 결국 존재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강의실에서 개념을 읊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보도 위에서 몸으로 선언하는 철학자다. 파를 들고 깔깔이를 걸치고, 선글라스 너머로 도시를 응시하며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그의 행위는 말보다 강력한 탈권위적 선언이다. 도시의 리듬을 예술로 바꾸는 그의 태도는, 하이데거가 말한 ‘자기-되기(Authentizität)’의 일상적 실천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존재는 곧 간지인가?”
그러나 그러한 단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더 설득력 있는 표현은 이렇다.
간지는 존재가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양상이며, 존재의 미학적 실천이다.
즉, 간지는 존재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서, 던져진 조건 속에서 자신을 선택하고 드러내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간지’라는 표현은 여러 맥락에서 언급되어 왔으나,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나는 어느 날 버스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듯 자신의 ‘간지’를 뿜어내며 존재를 표출하는 한 인물을 목격했다. 그 순간은 단순한 인상에 그치지 않고,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Entwurf)’ 개념과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렇게 나는 미약하게나마 ‘간지’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유할 수 있었다.
간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당당함, 진지함 속의 유머,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다. 그것은 외양을 넘어, 세계를 살아내는 태도다. 그렇게 간지는 존재를 빛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존재란, 결국 간지를 추구할 때 비로소 그 미학적 완성에 닿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