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 #패러디, #환상
책을 읽다가 문득 신승훈의 노래 〈사랑해서 헤어질 수 있다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이 네가 될 수는 없잖아.”
이 문장은 사랑의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짚는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것. 이 감정의 파장은 자연스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어졌다.
베르테르는 샤롯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녀는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약혼자 알베르트를 두고 있다. 감성적이고 이상을 좇는 베르테르는 신분과 현실의 장벽에 자주 부딪힌다. 처음에는 샤롯데를 대신할 다른 사랑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현실에 좌절하고 만다. 그는 샤롯데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장면들을 떠올리며 마음 한편이 아릿해졌다. 동시에 인권교육 시간에 들었던 비판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수업에서는 이 작품이 여성의 감정과 선택을 충분히 다루지 않고, 남성의 고통과 욕망을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한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에 적잖이 당황했다.
작품을 읽을 때는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관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르테르는 단순한 실연의 피해자가 아니라, 근대적 자아의 좌절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의 고통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당시 시대의 감수성과 충돌한다.
“남성 작가가 남성의 시선으로 썼다”는 이유만으로 작품 전체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젠더의 시선을 넘어서, 욕망의 구조로 작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라캉의 이론은 그 해석의 유효한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샤롯데는 베르테르의 욕망과 이상이 투사된 이미지에 가깝다. 그녀는 독립적인 주체라기보다, 베르테르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는 대상으로 기능한다. 반면 알베르트는 사회적 규범과 제도를 대표하며, 베르테르가 넘지 못하는 경계로 작용한다. 샤롯데는 가까이 있지만 결코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존재다. 그녀는 결핍을 채워주기보다 오히려 그 결핍을 지속시키고, 베르테르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실재계의 균열 앞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러나 꼭 베르테르는 죽어야만 했을까. 브람스와 클라라,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처럼 가까운 곳에서 우정을 지켜가는 선택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을 소유하려는 태도는 결국 제로섬 게임으로 귀결된다. 만약 그가 사랑을 소유가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더라면, 다른 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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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그리고 싶지만
나는 한 줄의 선도 그을 수 없네요.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는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이 앞에 있다면
나는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어요.
당신이 없는 날은
아주 먼 미래 같고,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면 되죠.
나는,
이 환상 속에
계속 머물고 싶어요.
당신이 떠오르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빨간 태양을 바라보겠어요.
“오늘, 나는 그녀를 만난다.”
그렇게 외치면
더 바랄 건 없어요.
그러면
모든 것이
희망 속에
잠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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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패러디하면서도, 그 슬픔을 현대적 감정으로 재해석하고,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사랑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그 환상이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다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후렴구가 귓가에 맴돈다.
“사랑해서 헤어져야 한다면, 헤어져도 사랑할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