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회 ( 부제: 후회를 좇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기억

by 비루투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고 총체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동일한 사실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과거의 조각들을 조합해 기억을 떠올린다. 이때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유리한 관점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무의식적으로 구축한 인지적 알고리즘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왜곡되거나, 때로는 허위로 변형되기도 한다.

현대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은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다. 기억은 하나의 완전한 파일처럼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저장되고 매번 재구성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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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는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과 흔들림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동시에 그는, 인간이 바로 그 불안정한 기억에 기대어 자신을 지탱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나는 『내가 시를 쓰고, AI가 해석하다』라는 에세이를 쓰며 기억의 상대성에 주목했다. 내가 쓴 시는 전적으로 기억에 기반했지만, 그 기억은 내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며, 책이나 영화 속 인물의 서사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인 파편들을 바탕으로 시를 썼고, AI가 그것을 해석했으며, 그 해석을 다시 엮어 에세이로 완성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기억의 진실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에 상상력이 덧붙고, 상상력에 다시 기억이 스며들며 문장이 만들어지고 이야기가 탄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 가운데 순수하게 ‘진실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책을 읽으며, 모디아노가 품었을 그 질문에 조용히 동참해보고자 했다.


힘없이 여위어가는 가로등 불빛
멀리서 드리워진 여인의 그림자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멀어지네_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직업은 탐정이다. 기롤랑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안다고 말하는 타인의 진술에 따라 기억을 재구성한다. 수집한 단서들은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그 와중에 어떤 여자에 대한 희미한 이미지가 잠시 떠오른다. 주변 사람들은 굳이 지나간 과거를 되짚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기에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고통이 짙어진다.


다가갈수록, 아련해지는 슬픔
고통만이 내 삶을 붙드는 이유

남은 것은 환멸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놓을 수 없네_


기롤랑은 기억의 단서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완전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외면하면, 그 공백은 결국 왜곡된 상으로 채워지게 될 뿐이다.


선택된 기억은 사람에 대한 것뿐 아니라 사물과도 연쇄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다른 기억들과 교차하며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고, 그 맥락에 따라 총체적인 서사가 구성되기 시작한다.

차디찬 진실을 감당할 것인가, 아니면 납득할 만한 상상 속에 머물 것인가.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그 선택이 곧 운명이 될 것이다.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해석이 달라질 뿐이다.


거침없이 나를 깨우는 경적 소리
유리창 너머, 아스라한 그 모습
바람처럼 흩날리는 기억의 파편

빛바랜 흔적들의 재를 긁어모아
다시 어둠의 거리로 발을 내딛는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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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멀어져 간다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섰다

연기처럼 스쳐 지나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그녀

그 시절의 거리들
건물도, 거리의 폭도
변하지 않았지만

대기 속에 떠돌던 무엇이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

붉은 벽돌 건물의 그림자가
길 위에 길게 늘어져 있다
누군가 막 떠난 자리처럼,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버린 걸까
아니면, 기억에 구멍이 나버린 걸까
그 사라진 것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길모퉁이에 있는 재즈바,
낮은 조명이 흔들리고
문틈 사이로 빛이 스며든다

창가에 앉은 남자 하나
외투 깃을 세운 채
창밖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하다

그 음악이 귓가에 조용히 울린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낡은 색소폰의 선율이
담배 연기를 타고
어떤 장면들이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바깥 거리엔
낡은 전차가 지나간다
그녀는 창밖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 시절의 거리들
그 사라진 것들
그녀의 흔적
그리고 나

모두가
그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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