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탱고, #크나스사 호르카이 #노벨상
라즐로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사탄탱고』는 제목에서부터 묵시록적 상징을 드러낸다. ‘사탄’과 ‘탱고’라는 낯선 조합은 파멸과 유혹의 춤을 연상시키며, 독자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리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긴 문장과 난해한 문체는 독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지만, 반복된 독서 끝에는 인간 공동체의 붕괴와 구원의 허상이라는 메시지가 드러나게 된다. 크라스나호르카이는 문체 자체를 통해 독자에게 불안과 긴장을 체험하게 하고, 그 속에서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작품 속 이리이마시는 몰락한 공동체에 돌아와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카리스마와 언변으로 주민들을 매혹시키며 미래를 약속하지만, 그 희망은 곧 절망으로 전환되고 공동체는 다시 붕괴한다. 이리이마시는 ‘구원자의 얼굴을 한 파괴자’로서, 권력과 구원의 구조적 속성을 드러내는 은유적 존재다. 이는 특정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민주주의·종교·기업 등 모든 조직에서 반복되는 인간사의 패턴이다. 권력은 늘 달콤한 약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그 끝에는 배신과 몰락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 드라마 『추노』 속 인물들과도 평행을 이룬다. 드라마에서 ‘그분’은 노비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영웅처럼 등장하지만, 그의 정체는 좌의정의 첩자였다. 그는 노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다가 배신하고 몰살시킨다. 희망을 가장한 파괴자의 얼굴은 노비들의 꿈을 산산조각 내며, 구원이 허상임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업복이다. 그는 노비 출신으로 강한 의지와 리더십을 지닌 인물이며, 자유를 꿈꾸며 ‘그분’을 따르지만 결국 그가 허위의 메시아임을 깨닫는다. 업복은 허위의 메시아에 맞서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절망 속에서도 주체로 서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특히 ‘그분’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순간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허위의 메시아를 향한 저항의 결정적 행위로써 공동체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을 상징한다.
『사탄탱고』의 이리이마시와 『추노』의 ‘그분’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등장했지만, 모두 구원자의 얼굴을 한 파괴자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아감벤의 ‘메시아적 시간’ 개념을 빌리면, 인간은 ‘이미' 와 아직’ 사이에서 끊임없이 기다린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허위의 메시아가 그 공백을 채운다. 이리이마시와 ‘그분’은 바로 그 허위의 메시아의 전형이다. 인간은 구원을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은 종종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진리의 빛을 갈망하는 인간이 허상의 그림자를 진리로 착각하는 위험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혁명적 희망이 현실에서 허위의 메시아로 변질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현대 정치의 포퓰리즘 지도자들 역시 대중의 절망을 이용해 구원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유지와 분열을 강화하는 장치일 뿐이다. 권력이 만드는 ‘아우라’는 그 자리가 만드는 환상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그 환상에 매혹되어 스스로를 속인다.
여기서 ‘탱고’라는 메타포는 다시 빛을 발한다. 본래 두 사람이 서로의 스텝을 맞추며 추는 춤이지만, 작품 속 술집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에 매몰되어 발걸음을 맞추지 못한다. 그 결과 춤은 조화가 아니라 불협화음으로 흐르고, 멈출 수 없는 탱고의 템포는 공동체의 몰락을 촉진한다. 그러나 동시에 탱고는 저항과 선택의 은유로도 읽힐 수 있다. 타인에게 휘둘려 추게 되는 춤은 권력과 허위의 메시아에 휘둘리는 삶을 드러내지만, 스스로의 스텝을 밟는 춤은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 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발걸음을 맞출 수 있다면 그것은 연대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춤을 춘다는 것은 '나' 이외에 다른 관계성을 회복하고 새로이 정립해 나가는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사탄탱고』와 『추노』가 보여주는 공통된 구조는 인간이 절망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이 허위의 메시아에 의해 왜곡되고 이용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이 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부의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의식과 서로를 향한 연대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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