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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Jun 29. 2022

아름다움에 관하여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

*죽어 빛을 잃은 반딧불도 살아 반짝이는 반딧불도 그 모두가 우리에겐 축복이었다.


라벨의 '파반느'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나는 글을 적을 때면, 주로 유키 구라모토의 곡을 듣는다. 서정적이면서도 반복적인 코드 진행은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어, 듣다가 보면 어느 순간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고 있다. 지금은 라벨의 '죽은 왕녀의 파반느'라는 곡을 듣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번에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동명의 제목을 가진 소설이기 때문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리메이크 버전도 굉장히 많았지만, 편곡자마다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 것들을 듣고자, 뮤직 앱을 랜덤으로 설정하였다.

 음악을 들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을 받아 적다 보면, 가슴에 와닿거나 감정이 정화되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선별된 문장 중에서 화두가 될만할 것을 찾게 되면 문두에 배치한다. 그걸 보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연상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내 생각과 감정이 음악과 공명하면서 첫 문장이 나오게 된다. 일단 첫 문장이 써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글이 수월하게 써지는 편이다. 사실, 글은 쓰는 것보다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전체를 수렴해서 하나의 가치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글이 전송되고 나면, 나의 역할은 끝난다. 그 이후는 독자들의 해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파반느'란 단어의 어감 때문에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지는데, '파반느'란 여성형 명사로 장중한 분위기의 춤곡을 말한다. 이 단어에  '죽은 왕후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무언가 의미심장한 절절함이 내재돼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박민규 작가가 이 음악을 모티브로 삼은 이유가 궁금했지만, 이 곡은 가사가 없기 때문에, 곡의 음률과 분위기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유추해야만 했다.

 원곡자인 모리스 라벨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본 후,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림의 특징은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 시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림을 그린 작가일 수도 있고, 감상하고 있는 관객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런데 '죽은 왕녀'라는 목적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 라벨은 그림 속의 '마리가리타 테레사'공주의 삶에서 영감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녀는 열 다섯 때 외삼촌 레오폴드 1세와 정략결혼하여 네 명의 아이를 출산 한 뒤, 2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림 속에는 가 가장 사랑받는 나이었던 5살에 그려진 것인데, 화가는 조카를 바라보는 듯한 애정을 그림 속에 듬뿍 담은 듯하다. 그와 달리, 라벨은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행복했던 시절과 대비되는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린 듯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서정적이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받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별을 앞둔 두 사람이 두 손을 맞잡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며 서로의 눈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진다. 그 순간은 짧을지라도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이 남는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 어디선가 잔잔히 물이 끓는 소리, 창을 두드리던 12월의 바람과... 출입구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뛰던 소리, 가슴이 뛰던소리, 가슴이 아플 정도로 내게 머물러 있던 그 소리가 지금도 느껴진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  맞닿은 가슴에서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 그리고 둘만의 호흡과 스텝은 주변의 흔한 소리들과 어우러지면서  곡의  파반 완성되었다.

 작가는 '가슴이 뛰던 소리'라는 구절을 반복하는데, 처음에는 '뛰다'라는 동사를 강조하고, 두 번째는 '소리'라는 명사를 강조하는 데, 사랑으로 벅차올랐던 둘만의 감정을, 다른 감정의 각도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는 같은 형식의 문장에다가, 각기 다른 품사조함으로써, 대비되는 감정의 추이를 잘 살려주고 있다.

 애처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내용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했었지만,  작가는 그러한 것을 무너뜨려버린다. 그는 의도적으로 소설의 표지그림인 '시녀들'에서 가장 못생기고 소외된 시녀를 확대한 사진을 실었다. 사실 그녀는 원작의 그림에서는 마리가리타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장치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작가는 오히려 공주를 축소시킴으로 그녀를 더 부각했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여주인공에게 '못생긴'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고, 분위기 있는 장면과 못생긴 여주인공과는 무언가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불편한 감정들이 있었다. 나의 이상적인 미의 기준은 그리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편견을 비웃기라도 한 듯, 진정한 사랑과 외모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요한의 말을 통하여 직설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사실, 못생겼다는 말은 굉장히 폭력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접두사 '못'은 '동사가 나타내는 동작을 할 수 없다거나 상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부정의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못생겼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평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인권적인 측면에서 상대방에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작가는 '무엇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라는 화두를 작품 전체에서 계속적으로 던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추구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었구나, 작품에서 여주인공을 무시하고 조롱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비록 그들처럼 사람을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쪽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나와 동등하다고 인지하쪽도 이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이상적인 미는 외면과 내면이 일치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고 따라서 외모만큼 내면도 최대한 가꿔나가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성격이 좋거나 탁월한 재능이 없다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러한 관점은 핑계일 뿐이며, 결국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나 같은 사람은 타인의 시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정당화하며 살아온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는 내용이 전개될수록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한다. 당신은 누군가를 부러워하기 때문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기 때문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결국 자가발전으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며,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더 힘든 세상을 살게 될 것이라고........

 뭐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세상에 저항하면서 경험한 실존조차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생긴 콤플렉스의 산물과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숨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기준 속에 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분투한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 외모의 미추는 우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겉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이 아름답지 못한 말이나 행위로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비일비재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표면적인 기준으로써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단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도 어둠 속에 매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부끄러워야 해야 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매몰되는 그들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 인간들에게 꼼짝 못 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양주동 박사는 '아람'(我有, 자기가 가지는 것)과 '답'( '같다'라는 뜻의 접미사 )는 의미로 '아름답다'를 풀이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는 것 같다'라는 뜻에서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파생되었고, 이를 풀이하면 자기의 가치 기준에 맞는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자기를 잘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이 곧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지경을 넓혀 가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물적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전체주의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계하였다.

 미디어 속에 전문가나 인플루언서는 항상 걱정 근심 없고 하는 것마다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살지 못하면 뒤처지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그들처럼 살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와 기준점이 다른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는 직업과 관계된 것을 하고, 책을 100권씩 읽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잘하는 것을 하고 있을 뿐, 나와 상황과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굳이 그 사람들처럼 될 이유도 없고, 내가 가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애초에 나와 사정이 다른데, 무리해서 바디 프로필을 찍으려 하거나, 기계적으로 책을 읽는 행위는 어리석은 것 같다. 그들의 삶을 참고를 할 수 있지만, 그들처럼 될 이유는 전혀 없고, 모든 것을 다 잘할 필요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자기 계발'은 자발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어야지, '자가발전'이 되어 자신의 삶을 소진하면서 해야 할 필요 따위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수 없어.


사랑에서의 상상력


 남주인공은 미남인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박색의 어머니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외되어있는 여주인공에게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움츠려 들었지만, 점차 주인공을 신뢰하게 되면서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가까워진 둘은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편견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된다. 여 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남 주인공이 비난받게 될 것을 우려했고, 두 사람의 사랑이 훼손되는 것보다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자 그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로 인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축복이며, 그것은 가슴과 가슴으로 맞닿아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에 나오는 것처럼 이러한 순수한 감정을 사고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그렇게 되어버릴 때 사랑이 가진 순수성은 형식적인 단어 속에 갇혀, 평범한 것들과 함께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사랑의 품사는 형용사에서 명사로 변해버리고, 사랑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에게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나는 부활의 김태원 씨가 만든 노래들을 좋아한다. 그의 음악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기 때문에 진부한 레퍼토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의 음악은 들을 때마다 추억에 잠기게 하면서도 감회를 새롭게 만든다.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할 때마다 새로운 탐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일상 속에서 느끼는 것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부활의 히트곡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부활'하고 있다.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상상력이다. 사랑은 그것에 어떠한 가치부여를 하는 가에 따라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수 없다면, 타인의 해석에 구속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욕구와 부합한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괴리감이 심하다면 좌절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그것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인데, 보통은 합리화하거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지만, 그럴 수 없다면 평생을 자학하면서 살게 될 확률이 높다.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기준을 정해 보는 것은 살아가면서 요한 과정 중의 하나이다. 물론 모든 것을 한 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사랑을 하면서도 타인의 해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남주인공과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이 가진 가장 큰 능력인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잃을까 혼자서 불안해했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그런데 남주인공에게는 그녀의 외모는 약점이 아니, 그의  사랑의 이유였다. 그는  그녀를 만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러한 연민을 사랑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반면 남주인공은 그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언제까지나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죽기 전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있다. 작가도 좀 더 상상력이 있었다면, 외모보다는 다른 것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둘이 맺어지는 결말을 시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을 읽은 후에는 너무도 현실적인 결말과 소설적인 여운으로 끝을 맺는 것에 대해 개인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대리만족이라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이라는 문장에 의미를 좀 더 부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행복에 이르는 길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기준들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국한되었을 뿐이었다. 법과 제도, 문화 의식의 변혁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우리가 어떤 모습, 어떤 위치에 있던지 나름의 장벽은 항상 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 문제점을 직시하고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올가미에서 평생 벗어날 수는 없다. 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었고, 그러한 압력을 지금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예전만큼의 압박을 느끼지는 않는다.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들을 삶 속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가들이 즐비한 서울과는 달리 지방에는 무명의 작가들이 많다. 시에서는 세금으로 그런 사람들을 지원하고 시민들의 문화생활을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러한 작가들은 난해한 설명을 늘어놓기보다, 그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공감을 통해 관객에게 호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그러한 공연과 전시회에서 그러한 진심을 읽을 때마다,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비록 작품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나만의 방식을 통해 예술을 하겠 마음을 먹었고, 그것을 브런치라는 앱을 통해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특별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기도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을 어떤 위치에 두고, 어떤 맥락에서 해석하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누구보다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라. 그것이 끝난 후에는 상상력을 그 안에 계속적으로 내포할 수 있어야 만한다. 그렇게 영역을 조금씩 넓혀 가다 보면 그 길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 알게 될 것이다.


참고도서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위즈덤하우스, 2009.07.20. >


그렇습니다. 실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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