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벌이 필요한 이유 “자가불화합성”
꿀벌이 있어야만 많은 농작물이 열매와 씨를 맺어, 우리가 생존할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을 과장된 주장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다.
바람이 불거나, 새와 짐승 혹은 사람이 꽃을 건들면 수술에 있는 꽃가루가 날려서 같은 꽃 암술머리에 붙어 쉽게 수분이 될 텐데, ‘굳이 꿀벌이 날아다니며 수분을 해줘야 하는가?’하는 질문이 따른다.
일부 풍매화(예; 옥수수, 밀, 소나무, 버드나무)는 바람에 의해 꽃가루가 쉽게 퍼져 꿀벌 같은 곤충의 도움 없이도 수정된다. 이들 꽃은 볼품없고 단조롭다. 하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 열매와 씨를 맺는 속씨식물(예; 사과, 배, 복숭아, 살구, 수박, 참외, 유채, 메밀)은 바람이나 진동으로 같은 꽃에서 꽃가루가 암술에 묻으면 수정이 되지 않고 '쭉정이'가 된다. 이는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 Self-incompatibility)' 때문이다.
보통 같은 유전자를 가진 꽃가루는 암술머리에서 발아하지 못하거나 화분관이 자라지 못해 꽃가루 핵이 밑씨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자기 꽃에서 자가수분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생리학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유전자 조합으로 인해 악성 열성인자가 발현하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도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도 근친 사이에 새끼를 낳으면, 감춰진 열성인자가 표출되어 비정상적이거나 부적합한 형질이 표출되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발정기에는 멀리 이동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 나라가 제도적으로 근친결혼을 금하고 있다. 꿀벌도 여왕벌이 근친 교잡을 피해서 벌통을 떠나 수 km나 멀리 날아가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수벌들과 짝짓기 하는 굳어진 습성이 있다.
사과 꽃을 예로 들어보겠다.
왼쪽 그림에서 사과꽃 암술에 같은 꽃이나 같은 나무의 꽃에서 생성된 꽃가루로 자가수분이 되면, 꽃가루관이 생장을 멈추어 수정에 실패한다. 타가수분이 되어야 꽃가루관이 생장하여 핵이 밑씨에 도달하여 수정된다. 그래서 오른쪽 그림처럼 타가수분으로 씨방에 씨가 맺혀야 과육이 발달하고, 타가수분으로 수정되지 못한 씨방은 쭉정이가 되어 과육이 줄어든다. 결국 이 사과는 상품성이 없는 일그러진 과일이 된다.
여름철에 인기가 많은 수박은 아예 자가수분이 일어나지 않도록, 암술이나 수술만 있는 암꽃과 수꽃을 따로 만든다. 꿀벌에 의해 정상적으로 타가수분이 안 된 수박은 씨가 맺히지 않아, 채 익지도 않는 속이 하얀 맛없는 수박이 열린다. 딸기, 참외, 수박 비닐하우스에 꿀벌 벌통을 옮겨 놓는 이유다.
꿀벌은 한 꽃에서 동종(同種)의 꽃으로 날아다니며, 타가수분 즉 교차 수분(Cross-pollination)이 되도록 도와준다. 그래서 많은 농작물과 야생 식물이 씨를 맺고, 알찬 열매가 열린다.
꿀벌은 꽃을 피우는 속씨식물과 공생한다. 꽃에서 먹이로 꿀을 얻는 대신에 순조로운 타가수분을 이루어준다. 몸이 작고 날렵하며, 잔털이 많아 꽃을 찾아다니며 꽃가루를 옮기기에 적합하다. 또한, 꿀벌은 공생하는 꽃에 대한 의리와 충실성(Constancy)이 깊어서, 같은 종의 꽃을 지속해서 방문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식물의 타가수분의 성공률을 높인다. 이는 화분 매개자로서 꿀벌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비나 파리, 풍뎅이, 다른 야생벌들은 아무 꽃이나 제멋대로 찾아다니며 꽃가루를 엉뚱한 식물의 꽃에 옮겨서 수분 효율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한편, 꽃을 찾는 나비나 풍뎅이, 파리는 안타깝게도 애벌레 시절에 식물의 잎을 갉아먹는 해충으로 식물에 피해를 주기도 한다. 가위벌이나 호박벌은 특정 계절, 또는 일정한 시기에만 꽃을 찾기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꽃가루 수분에는 역부족이다.
인류 문명이 발달하며 자연생태계가 훼손되고 극심한 환경오염과 더불어, 사람이 임의로 개편한 경작지로 인해서, 꽃가루 수분 곤충은 그 종 수와 개체 수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꽃가루 수분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꿀벌이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꽃을 피워 씨를 맺는 속씨식물에게 꿀벌은 단지 꽃에서 꿀을 찾는 방랑객이 아니라, 쭉정이가 되지 않도록 다양한 유전자를 유지하며 번식하도록 도와주었던, 공생의 역사를 동고동락한 소중한 친구이다.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과 이를 찾는 꿀벌의 몸짓은 자연계에서 가장 정겹고 속깊은 우정의 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