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뒤의 나무를 그리는 사람

애니메이션 배경디자이너

by Rima


처음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땐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작화 수업을 들어보고 난 바로 몇 주 후였다.


연필 한 자루로 같은 캐릭터 그림을

동작만 수십 장씩 쪼개 그려야 하는 작화 수업은

내 천재성(이라고 믿었던 것)을 시험하기보다

내 인내심의 바닥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자투리 수업'격이었던

배경 미술이라는 세계를 처음 맛보고 나서

'이거면 할만하겠는데!' 하고

지금 보면 끔찍한 완성도이지만

열정을 불태워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그렇게 배경아트를 전문으로 납품하는 회사에 입사했다.


배경맨이란,

머글들에겐 좀 생소할 수 있는 직업인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캐릭터들의 뒤에 배치되는 공간을

만들고 채우는 직업이다.

산도 그리고 나무도 그리고,

방 내부나 웅장한 성 같은 것들을 그려댄다.


박봉이지만 꽤 전문직이긴 해서

이 바닥엔 여러 파트의 직종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배경에 종사하는 인원은 적은 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첫 1-2년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

거의 선임의 시간만 갉아먹는 짐짝 같은 존재라

눈치 보면서 박봉과 야근을 견디며 3년 차는 되어야

그래도 좀 쓸모 있어지다 보니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

게다가 유명세를 달 수 있는

테크트리에서는 아무래도 두어 길 벗어나있기도 하다.


보통 작화 쪽으로 시작해야

총감독으로 올라가는 길이 생기고

작품 맨 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보니

보통 생각하는 광영과는 좀 거리가 있다.


생각해 보면

선두에 서서 탑을 찍는 일에는

애초에 크게 욕심이 없는 내가

여기 서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긴 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취미든 뭐든 금방 질려해서

뭔가를 딥디깅해서 끝장을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내가 여태 이걸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은

작은 기적이기도 하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처럼

지금은 그래도 경력이 꽤 되다 보니

일이 끊기는 일도 없고 나름 먹고 살만큼 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달리 이거만 한 직업이 없기도 하다.


아무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수십 화의 시리즈를 본 시청자들도

배경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조차 거의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거기 없으면 안 되는 파트.

혼자 음흉하게 자기만족을 즐기는 나로서는 천직이랄까.


고궁의 기와밑이나 나선형 계단을 보면

저런 건 그리고 싶지 않다든지,

골목의 빼곡하게 늘어선 건물들에 붙어있는

파이프들이나 계량기를 보며 저렇게 생겼구나~라던지,

해 질 녘의 빌딩숲을 바라보면서

오~그림자가 저렇게 떨어지는구나 같은

아무도 이해 못 할 생각에 잠기는 직업병에 20년째 시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질리지 않고 그림자 같은 역할을 아직 꿋꿋하게 수행중이다.


태어나길 조연 같은 삶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사람이란 게

실제 이렇게 있는가보다.

그래서 내면적으로는 욕구불만으로

온갖 망상을 하며 관심을 갈구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망상 속에서 이루어졌을 때만 즐겁다.

대놓고 관심받는 것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오늘도 나는 엔딩크레디트 중간쯤에

올라가고 있는 내 이름 석자를 찾아보고,

아무도 관심 없는

화면 뒤쪽에 깔려있는 내 그림들을 혼자 품평하며

욕먹지 않을 퀄리티를 유지한 것에 만족한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유지가 되는 것이란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임이 분명하다.





- 망할 AI가 제 생계를 위협하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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