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면 병 되는 당신을 위한 처방
일단 부모님 모두 욕이란 걸 안 하는 분들이셨다.
당연히 집 안에서 욕을 배울 일이 없었다.
어릴 적 접하는 콘텐츠라는 것은
책장에 꽂혀 있는 위인 전집이라든지, 학습만화,
약간의 일탈(?)을 경험할 수 있는 청소년용 추리소설들과
피아노 학원에 다니면서 접하게 된 친숙한 클래식 소곡집,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빨강 머리 앤 같은 소녀 감성의 영상물들이었다.
그야말로 유니콘 마을 같은 욕 청정구역에서
메르헨틱한 공상을 하며 곱게 살고 있었다.
예쁜 것만 담고 듣던 순박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거친 욕을 구사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한 친구가 교실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아 존나 짜증나 담탱이! 라고 사자후를 내질렀을 때,
나는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기억할 정도면 말 다 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다른 애들도 함께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감에 따라
흑역사를 생성하는 반항기로 돌입하면서
욕은 점점 입에 착착 붙어 농익어갔고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엔 거의 추임새나 형용사 같은 존재로
우리의 대화 사이사이에 자리를 깔았다.
이 이야기의 흐름상 이제 바른 말을 써야겠다.
라는 결론이겠거니 짐작하겠지만
아니다.
난 여전히 욕 없이 살 수가 없다.
나이도 슬그머니 마흔을 넘어섰음에도
여전히 욕쟁이로 살고 있다.
쌍욕의 미학과 부작용에 대한 고찰이 가볍게 있긴 했다.
‘눈치껏 분위기 파악하며 쓰자.’
대화하는 그룹의 성향도 중요하고,
때와 장소도 가려야 한다.
욕 자체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고,
단체 톡방 같은 데는 공공장소 같은 개념이라
멤버들과 어느 정도 친밀하지 않으면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엔 같은 썰도 약간의 욕 추임새가 붙어가야
서사의 변주가 사는 느낌이라 그 재미로 쓰기도 하지만,
희로애락의 분출을 쌍욕으로 자주 승화하기도 한다.
그렇게까지 머리 굴리며 쓸 거면
안 쓰면 되지 않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런데 365일 바르고 예쁜 말만 하고 살라고 하면
그것은 너무 답답해 욕구 불만에 시달릴 것 같다.
‘정말 화가 나요!’
‘당신은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와 너무 좋다~’
말을 하다 만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 찝찝하다.
문학적인 접근도 고려해 봤다.
...떠오르지 않는다.
뇌가 출력 장애를 일으킨다.
상스럽고 저질스러운 표현이지만
그 금기를 깨고 표출하는 시원함이란 게 분명히 있다.
찰진 발음으로 내공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하는 욕은
제대로 진국이라 속이 뻥 뚫리기도 하고,
더 강력한 공감대를 만들어준다.
이 가성비 좋은 카타르시스는 쉽게 끊을 수 없다.
제이크 지렌할이 주연으로 연기한 '데몰리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내용은 대충 와이프의 교통사고 사망 이후
그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어쩌다 엮여 도움받은 여자의 집에서 마주친 그녀의 10대 아들과
이런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이크: 너 fuck을 많이 쓰는구나.
아이:그래서요?
제이크: 그럼 제대로 쓰는 것이 아니지.
아이: fuck, 뭔 소리예요?
제이크: 말한 그대로야. fuck은 좋은 단어지만 너무 많이 쓰면 효과가 없거든. 멍청하게 들리지.
아이: fuck, 꺼져요.
제이크: 그거 봐. 난 아무렇지도 않고 너만 바보 같아졌어. 좋은 하루 보내라~
아이: 저 인간은 뭐야?
아이는 짜증스럽게 노려보면서도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짓는다.
(그걸 보며 나도 같은 표정을 지었던 거 같다.)
아이는 영화 후반 즈음엔
제이크에게 당신 말을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다고 인정하며
제법 성장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멀쩡한 사람을 향해서 욕을 쓰면 없어 보인다.
추임새나 사물에만 적용해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
욕을 적재적소에 구사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꽤 멋져 보이기까지 한다.
속에 쌓인 이야기들을 욕과 함께 쏟아내면
우울하고 침체되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욕의 순기능이라고나 할까.
답답하게 참으면서 애쓰는 대신
치고 빠지는 센스를 연마해 보는 쪽을 선택했다.
욕도 없이 이 힘들고 고단한 세상을 살아낼 자신이 없다.
욕이란 것도 결국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솔직히 한국욕은 창의적이다 못해 예술적이지 않나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