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좋겠다.
안녕? 이렇게 인사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얼마 전 친정에서 오래된 사진 속 너를 봤어.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 잘 지낼 거라고 믿어. 너는 똑똑하니까. 그런데 난 네가 못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어.
나는 네가 참 좋았어. 너는 노래도 잘하고, 친구들도 많았지. 난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야자가 끝나고 근처 구석진 공원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네가 노래를 흥얼거리면 얼마나 감미롭던지 나 혼자 콘서트를 즐기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 어느 날이던가 모의고사가 끝나고 호기롭게 야자를 쨌던 그날 말이야. 언제나처럼 그 공원에서 성적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말싸움으로 번지고 우리 절교하기로 했었잖아? 넌 나보고 우린 수준이 안 맞는다고 했어. 너도 알았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사실 그전부터 우리가 진짜 친한 친구는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수화동아리 시험을 본 날 넌 나에게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될 걸 왜 대충 했냐고 했지? 솔직히 난 그 동아리 들기 싫었다? 양손을 자유롭게 쓰기 어렵거든. 넌 내가 왼손잡이인 게 겉멋 든 것 같다고 했었잖아. 나는 사실 오른손으로 숟가락질도 못하는걸. 지금도 자판 실력은 늘지 않더라고. 키보드 만지는 일을 5년이나 했는데도 그대로인 거 있지? 사실 앞으로도 이 이상 빨라지지는 않을 거야.
우리 쇼핑을 참 좋아했었잖아? 구두, 가방, 청바지. 넌 사고 싶은 게 많았어. 몇 군데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나는 신경질적으로 아무거나 사라고 하거나 갑자기 먼저 가버렸어. 그냥 화가 나더라고. 그래도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랑 놀아줬어. 새로 산 예쁜 옷을 입고 놀러 가면 그때도 나를 챙겨 같이 가주는 네가 너무 고맙기도 했어.
시험을 핑계로 밤새 놀 궁리만 가득했던 그때 너희 집에서 몰래 잡지를 보고 있었던 날. 너는 기억 안 날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떡볶이를 해주셨고, 아버님은 술에 취해서도 내 몫까지 챙겨 꽃다발을 세 개 사 오셨던 적이 있거든? 어머니랑 너는 시큰둥한 반응이더라고. 술만 먹으면 저런다면서 말이야. 난 어땠냐면 충격적이었어. 원래 가족은 이런 건가 싶고,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지. 늦잠 때문에 그 꽃다발을 챙기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쉬워했어.
어쩌다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더 이상 공원을 안 갔었지? 누가 그러더라. 나는 너의 친구가 아니라고. 불쌍해서 놀아준다고 했다고. 근데 자기 생각에는 나랑 다니면 네가 착한 사람인 척할 수 있어서 인 것 같대. 생각해 보니 맞는 말 같더라고. 친한 친구도 없고, 입만 열면 입바른 소리나 하는 나 같은 애가 너 아니면 어떻게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겠니? 세상에. 난 그것도 모르고, 이런 바보 같으니.
그때 내 사복이라고는 티셔츠 몇 벌, 바지 두어 벌이 다였거든? 네가 물었었잖아. 옷이 교복밖에 없냐고. 맞아 교복밖에 없었어. 그래서 너를 따라갈 수 없었어. 일탈을 저지르러 교복을 입고 가는 애가 어디 있겠니? 나는 집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었잖아. 나 사실 공부 안 했어. 그런 날은 다음날 입어야 하는 교복 블라우스를 빨다가 가슴에서 천 불이 나서 비누를 냅다 던지고는 얼굴을 감싸기도 했고.
집을 나간 엄마는 연락이 되긴 했지만 아빠에게는 비밀로 했어. 그래도 어떻게든 아침을 먹었고, 제시간에 등교를 했지. 어떤 날은 아빠의 애인이 전화를 해서 내가 받으니 횡설수설 보일러를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부탁하려고 전화했다고 하면, 나는 알면서 모른 척 아빠에게 수화기를 건넸어. 우리 아빠는 전기 기술자인데 보일러를 고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에게 집은 그랬어. 나는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졸업식 때 꽃다발을 받지 못했거든. 졸업식도 아닌데 아빠가 가족에게 꽃을 선물한다고?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네가 절교를 선언할 만했어. 나는 매사 너의 행동에 시비를 걸고, 윤리 운운하며 너를 비난했지. 그래봤자 어른 몰래 술을 마시거나 남자 친구와 키스를 했을 뿐이었는데 말이야. 아 맞다, 담배도 있었지? 근데 진짜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할 말이 없다. 나도 아빠 담배를 훔쳐 몇 번 피워봤었거든.
아무리 해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더라고. 계속 비참할 수는 없었고 나는 너를 부러워하는 대신 한심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 너는 내가 답답하다고 습관처럼 말했는데 나는 그런 네가 너무 답답했었어. 자상한 아빠와 아침마다 사과를 깎아주는 엄마가 있는데 왜 자꾸 화를 내는 걸까 복에 겨워 저러나 싶기도 했어. 너 그때 엄마에게 받은 학원비로 노래방을 가고, 학원 시간에 맞춰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냈잖아? 그 공원에서 말이야. 우리 앉았던 그네에서.
생각해 보면 너도 너만의 상처가 있었을 거야. 원래 사람이 그렇잖아. 자기 문제가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고 그런 거. 나는 내 문제에 푹 빠져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의지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해. 네가 나한테 그랬지? 너는 슬픈 드라마 주인공 놀이를 하는 것 같다고. 맞아,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보였어. 근데 그거 알아? 너도 그래 보였었다?
어느 순간 나는 반에서 유령이 되어있더라. 처음엔 그래도 은따 정도였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나는 투명 인간 같은 존재였어. 누가 그러던데 네가 나보고 병신이라고 했대. 주제를 모른다고도 했다더라고. 진짜인지는 묻지 않았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더 이상 너를 한심하게 여길 여력도 자격도 없어졌거든. 나는 있잖아 하루를 버티는 것만도 너무 숨이 막혔었다? 매 순간 알몸으로 어디도 숨을 곳이 없는 광장에 서있는 기분이었어.
처음엔 진짜 우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내가 너를 동경해서? 나의 속 사정을 숨겨서? 아직 잘 모르겠어. 너도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나에게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겠지. 너도 나도 서툴러서 그랬을 거야. 우린 고작 청소년이었잖아.
그래도 난 네가 덜 행복했으면 좋겠어. 너의 말대로 내가 좀 답답한 사람이라서 이해되지 않으면 좀 꽁해있는 스타일이거든. 너는 나에게 학창 시절 빛나던 순간이자 지옥이었어. 나는 너에게 무엇이었니? 진짜 병신이라고 생각했다면 다행이야. 양심의 가책 없이 너를 미워할 수 있으니. 만약 아니라면 그냥 같은 반 친구 11번 정도면 어떨까? 혹시라도 너에게 내가 좋은 친구로 기억되면 그건 그대로 속상할 것 같거든.
너와 찍은 사진은 버릴 생각이야. 쓰레기통에 사진을 버리는 순간이 되면, 네가 덜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고 ‘이런 애가 있었지. 뭐가 잘나서 나한테 그랬담. 흥.’ 이렇게 생각하고 그때의 감정도 의미 없이 버리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