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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May 31. 2016

그 해 하늘은 푸르렀지

마늘이 싹을 냈다

기억이란 여름철 멀리 사방산에 내리던 소낙비 빗줄기와도 같아서 이쪽은 날이 쨍쨍한대도 어느샌가 내 눈 앞의 개울물을 철철 넘치게 하는 것처럼 다소 엉뚱하게도 아무런 연상도 되지 않던 것들이라도 저희들끼리 내 머리의 어디쯤엔가 계속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그이가 '툭' 던진 말씀에 그해 여름, 물에 빠져 거의 죽을 뻔 했다가 개헤엄을 치며 겨우 살아난 기억이 여름철 단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종 임금이 폐위된 후 영월로 그 처소를 옮기던 중 잠시 쉬어간 곳이 바로 이곳, 단강(丹江).

너무 슬퍼 흘린 눈물이 붉은 빛을 띄어 붉다는 뜻(訓)을 마음에 담아 단종 임금의 시호의 단(端) 대신 붉을 단(丹)자를 갖다 붙여 그 강의 이름은 본래 지명을 버리고 단강이 되어버렸다 했다.

숱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날의 아픔을 기억할리야 있겠냐마는 이 단어가 주는 애처로운 느낌은 어느 때 그곳을 가더라도  제대로 확인시켜 주는 마력이 있었다.



언젠가의 차부(車部)가 있던 끽경자(끝亭子)에서 추운 강바람을 맞으며 강가로 길게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좌우로는 어느새 푸른 빛 아지랭이가 아른거렸다.

마늘이 싹을 냈다.

아침저녁으로 서릿발이 여전하고 강바람이 매서운데도 짚가리 사이 사이로 푸른 싹을 여보란 듯이 잘도 뽑아내었다.

가만 들여다 보면 밑은 하얗고 위로 올라갈수록 옅은 노랑 빛깔에서 다시 연두로,  가장 윗쪽은 푸른 빛이 제법 쨍한 테를 나타내는 걸 바라다 보면 어쩐지 뭉클하기도 했다.



단강의 봄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가장 추울 때에라야 제 빛을 잘 드러내고 그때가 봄의 시작은 아닐런지.

아무튼 그 매운 맛이야 두 말 할 나위도 없는 이곳 마늘은 어쩐지 단 맛도 좀 났는데 그게 지명 때문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어린 나이에는 그런 일들이 잘도 연상되었다.

생마늘을 된장에 푹 찍어 뜨신 밥과 함께 먹으면 그 아릿한 매운 맛 뒤의 단 맛.

참으로 인생을 잘도 표현했다.



어느새 강바람이 부드러운 봄을 가득 실어다 주면 '강께밭'은 어느새 푸른 물결이 가득했다.

그때가 되면 아이들의 반찬도 전부 마늘쫑으로 바뀌었다.

걔 중에 더러 멸치 몇 마리쯤이나 넣어 볶아온 친구가 있었을까.

고추장에 무쳐 온 마늘쫑이 대부분이었다.   마늘쫑이야 그 놈이 그 놈일테지만 한 가지 위안이 되었던 점은 장 맛이 집집마다 다 달랐으므로 점심 시간은 다채로웠다. 그중에서도 나는 C가 싸 오는 마늘쫑을 참 좋아했는데 어쩌다 이런 말-참 맛있다-을 할라치면 '에이, 뭘'하면서 순박한 척을 했다.


'좀 달라고 맹한 녀석아.'


순둥이 친구들. 그들과 별로 다를 게 없던 나.



마늘쫑도 다 뽑아먹고 이제는 삶아내어도 이도 안 들어갈 정도가 되면 마늘은 어느새 낙엽진 나무를 흉내내며 누런 잎을 달았다.

강께 가는 길에는 미루나무가 짙은 푸른 빛을 띄었다.

마늘을 뽑을 때가 되었다.

농사라야 전혀 해 본 적도 없이 이전 해 당근밭에 씨앗을 뿌려 본 게 다였던지라 마늘밭에서 몇 번 마늘을 뽑다가 뒤로 자빠지기만 해서 어른들은 바로 앞 저수지에 가서 놀라고 하였다.

큰 비가 지나고 난 뒤로 군데 군데 웅덩이가 생겼더랬는데 뜨거운 볕을 받아 따뜻했다.

그렇게 물에서 참방거리고 노는데 한 순간 몸이 떠오르더니 웅덩이 가장자리 턱을 넘어서고 말았다.

일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연약한 다리힘이 도무지 견디질 못했다.

급기야 사람 살리라 소리를 지르는데 들리지는 않고 손만 휘저으니 어른들도 손을 흔들어준다.


'나 죽겠다고!'


마지막으로 외쳐 보는데 '어맛!'

떠내려가는 내 몸을 돌 무덤이 잡아 세운다.

나 같이 미련한 놈을 붙잡아 주려고 누군가 쌓아둔 모양이었다.

일어나 보니 무릎 정도 깊이.

겨우 몸을 일으켜 젖은 머리 그대로 저 아래 강물을 보니 황톳물이 넘실거렸다.



그 해 하늘은 참 푸르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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