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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May 29. 2016

인연

미룰 수 없는 일

인연


살구나무가 많아서 행구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즈넉한 느낌의 그 동네는 W시 남부시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외곽에 자리잡았다. 산자락부터 국형사 올라가는 길목까지 아파트가 군데 군데 들어서긴 했어도 그 뒷편으로는 맑은 물을 가둔 논이 꽤 여럿 되었다.

C선배와도 가 보았던 국형사에는 오랜 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떠갔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철철 넘쳐난 물이 그 논으로도 더러 들어갔을 터였다.


그댁 아저씨는 그 논에서 가을 볕에 말려 둔 볍씨를 퍼담고 계셨다. 마지막 가마니에 벼를 다 채우시더니 큰길 건넛편까지 리어카를 끄셨다.

팔뚝에 시퍼런 힘줄이 돋았다. 구릿빛 팔뚝은 나의 그것보다 몇 배 되지 싶었다.

평소에 여섯 자루쯤 되는 걸 혼자 싣고 다니셨다 하니 뭐 내가 돕는 것은 가로고칠 뿐일지 몰랐다. 어쨌든 건넛편에 가 보니 동네가 변하는 동안 저혼자 변하지 않았을 법한 허름한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에는 미리 맡겨 두었던 볍씨가 다 탈곡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까와 똑같이 여섯 가마니를 싣고 치악교를 넘었다.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라 마음이 불안했는데 저녁 상이 차려지는 동안 창고에 짐을 다 부려 넣으셨다.


수 십 년 전 시골에서 이곳에 오신 뒤로 자리잡는 동안  조그만 슈퍼를 하시면서 겨울엔 연탄장사를 겸하여 하시고 인근 논을 얻어 땅을 부치시며 모두 오남매를 키워내셨다고 하셨다.

이마 앞이 넓고 단단하셨던 모습이 외고집 인생을 보여 주시는 듯했다.

반면 새벽 일을 마치고 난 뒤 조그만 슈퍼에서 꾸벅 꾸벅 졸고 계셨던 아주머니는 어쩐지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만 같았다.

추억이 가득 담긴 예전 골목길이 소방도로로 넓혀지게 되면서 우리 가족은 새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이사 온 곳이 그댁 바로 옆집 이층이었다.


개운동 3xx-xx번지.

본래 뜻은 '운이 열린다'는 멋들어진 곳이었으나 음(音)도 그렇고 복개천이 생긴 지 얼마되지 않은 W시에서는 꽤 오래된 동네였다. 복개천 좌측을 따라 가면 5일장이 섰고 우측으로 가다 길을 꺾어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치악산이 가까웠다.

그렇게 그댁 옆으로 가게 된 것이 햇수로 벌써 십 수 해.


동네 이름 덕분이었을까?

그댁과의 인연은 참 맑고도 깊었다.

정이 깊었던 아주머니야 말할 것도 없이 울엄니를 친동생처럼 아끼셔서 늘 간곡한 말로써 다독여 주셨는데 어찌 그 은혜를 살아 생전에 갚을 수 있을까.

이마가 단단해 보이셨던 아저씨께서도 실은 부드러운 분이셨나 보다.

해마다 잊지 않고 큰 명절 때마다 세배를 올리니 그걸 참 기특하다 여기셨다.

나와 동생이야 시골에서 십 수 해를 사는 동안 자연스레 체득한 덕에 웃어른께 절을 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그 당시만 해도 그렇게 일부러 이웃집 어른께 큰절을 올리는 것은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일 말고라도 이래 저래 인사를 나누며 가깝게 지내다 보니 아주머니와 울엄니는 어느덧 속깊은 얘기를 하는 사이가 되셨나 보다.

나와 동생 키워오신 얘기를 하시는 동안 눈물 많이 흘리셨다 들었다.


그러던 중 그댁에서 가을걷이한 것 중 특히 좋은 것을 보내오시기 시작한 적이 있는데 그 내력이 이렇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저씨께 아주머니가 그간 들으셨던 내용 중 울엄니가 젊어 혼자 되신 뒤로 우리들 키워온 말씀을 하셨던 모양인데 한참이나 말씀이 없으시던 아저씨는 아무래도 친구 같다 하셨다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서울에 터를 잡고 살아 예전처럼 자주 뵈올 수는 없지만 어디 마음이야 그러하랴.


바로 얼마 전에도 일부러 두부를 만들어 보내셨다.

우리가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떡을 만드시고 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암반에 칼국수 반죽을 넓게 밀어 호박을 썰어 칼국수를 한 그릇 배불리 먹이우신다.

날이 추워지는 때라면 양념간장을 넣어 후루룩 말아 먹던 그 생각이 몹시 난다. 더워지는 때라면 가마솥에 삶아내던 닭 백숙.

그 무렵 아저씨를 돕던 논 뒤로 피어나던 살구나무 꽃 필 적엔 언제라도 꼭 한번 찾아 뵈어야지.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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