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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Jun 03. 2016

추억이라는 것

우동 먹는 날

1.

일본 여행을 할 때 늘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추억에 다른 추억을 덧입혀보고 그 위에 또 그때마다의 해석을 늘어 놓는 것처럼, 어두운 계곡의 한 켠에서 그대로 세상을 닮은 듯한 모습으로 어떤 때에는 이끼 옷을 덮고 있는 바위 같기도 하고, 거친 비바람에 속이 파이기도 한 거대한 고목 같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말도 없이 묵묵히 흐르는 저 검은 빛 강물처럼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을 가게가 많다는 점이다.


그런 가게는 몇 세대 동안이나 쭉 이어져 내려 오는 동안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마련이었는데 어느 때부터는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길손들이 아니라 그 가게가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게의 모퉁이돌에게서는 어느 날, 잠시 담배를 태우며 바쁜 숨을 잠시 돌렸을 법한 어떤 이의 모습이 그려졌고, 가게 안 작은 탁자에 앉으면 삿갓을 쓰고 먼 길을 달려 온 초로의 승려가 길을 멈추고 시원한 소바 한 그릇을 대접받았을 법한 느낌이 강렬히 전해졌다 .

선한 인상의 주인이 건네는 따뜻한 우동에 시치미(しちみ[七味])를 뿌리고 가볍게 저은 뒤 젓가락으로 후루룩 먹을 때면 그 소리를 뒤따라 뜨끈하게 전해지는 국물과 시치미의 맛이 다시 한번 나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었다 .




2.

시치미는 일곱 가지 맛을 내는 조미료로서 가게마다 만드는 방법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다 같은 된장이라도 집집마다 맛이 다 다른 것처럼 시치미도 가게마다 풍미가 달랐다.

혀 끝에 알싸함을 주는 맛, 깊고 진한 맛, 파를 많이 넣어 볶아 달달한 맛도 있었다 .

일곱 가지 맛을 내기 위해서 어떠한 재료를 얼마나 넣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하나 하나의 향료마다 제 나름의 철학을 담아서 만는다 생각하니 소위 고춧가루 하나만을 넣어 먹는 휴게소의 가락국수 맛은 빠르다는 편리함은 있었지만 어쩐지 좀 아쉬웠다.


우동에 넣어 먹는 시치미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게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던 바, 어떤 날은 모든 끼니를 우동으로 떼울 때도 있었지만 정작 궁금했던 시치미의 맛을 내 일본어 실력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일본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런 갈증을 풀지 못해 늘 목이 팍팍했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감흥을 주는 것은 일곱가지 맛의 시치미나 고풍스러운 가구와 오래된 가게 건물이 주는 분위기와 거기서 비롯된 상상력이 아니라, 주인의 인정 (人情 )이었다.

주인의 인정이 모든 것을 아우를 때에라야 깊은  빛을 발했다.




3.

이십 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찾아 오는 손님의 입맛에 맞춰 가락국수를 끓여 주던 포장마차가 많았다. 국수라는 게 보기엔 다 똑같아 보일지 모르나 실로 모르는 말씀.

국물을 적게 하든지 많게 하든지 날달걀을 풀어주든지 그냥 주든지 고춧가루를 넣어 주든지 넣지 않든지, 참기름을 넣어주든지 그냥 담백하게 먹든지, 아니면 모든 걸 섞어 먹는다든지.

또, 금요일 퇴근 무렵이면 찾아온다든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때에라야 온다든지 , 매일매일 온다든지, 잊을 만하면 온다든지.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떤 이가 어떤 식으로 찾아오든지 그 입맛에 맞춰 낼 줄 알았다 .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의 가락국수는 오래 끓인 오뎅 국물 베이스를 따로 삶은 가락국수 면발에 부어 고춧가루 팍팍 뿌려서 휙 내민 듯한 느낌이었지만 먹는 사람마다 풀어내는 속은 다 달랐다 .

담소하며 마시는 사람에게도, 술 취해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도 시원한 맛으로 다가왔다 .

언젠가 한번은 아는 지인에게 이런 느낌의 추억을 풀었더니 나를 데리고 홍대로 무작정 달렸다.

가 보니 기계면을 뽑아 국물에 말아주는 우동집이 있었는데 급하게 한 그릇 주문해서 먹어 보니 옛날 향수에 푹 젖어 들 수 있었다 .

우리 주변을 꽉 채워주던 이러한 포장마차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장구한 역사만큼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수 십 년을 계속 이어온 우리네 포장마차는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냐?

그곳에 담겨져 있던 슬픔과 애환, 기쁨과 환호는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작은 구멍가게 앞에 의자 한 두 개 깔고 좌판을 벌여 놓고 팔던 모주와 두부김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잔 기울이고 있노라면 주인 할머니는 집 김치를 꺼내 쓱쓱 썰어주었다 .

막걸리에, 신김치에 우리는 불콰해진 얼굴로 웃었다 .


어느 때인가 추억을 달래기 위해 가보았던 시장 터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외상술 먹는 날이면 내 어머니 같은 타박을 하면서도 다음 날 쓰린 속을 달래 줄 계란찜을 미리 해 주던 그런 맛은 어디로 갔는지... 계란찜 하나라도 먹으려면 육천원의 돈을 지불해야지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일본에 가서 건진 향취에 견줄만한 '우리네 맛'이라는 게 있었는데 이제는 채우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못내 아쉬웠다 .




4.

눈(雪)이 소복이 쌓여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빨아들이면 오직 밤의 적막만이 남았다. 그런 겨울밤이면 나는 항상 그곳을 찾았다.

눈은 그쳤지만 매서운 바람이 일어 양 손을 겨드랑이에 꼭 끼운 채 종종 걸음을 걸었다.

좁고 가느다란 골목을 지나 신호등을 건넜다. 농협을 끼고 다시 시장을 향해 신호등을 한번 더 건넜다.

예전 살던 언덕 위 명륜동을 보며 눈이 어느 정도 쌓였는지 가늠해 보았지만 통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검은 빛 바다 속에서 유영하는 해파리인 듯 점멸하는 신호등 불빛만 가득하였다 .

그 해파리 무리는 붉은 색에서 푸른 색으로, 다시 누런 색으로 변하였다.

꾸물럭 꾸물럭 해파리들이 유영하는 바다를 건너 원주의 제일 여고라고 하는 ○○여고를 지나며 서점에서 일하던 때 잠시 만났던 진달래 브로치를 교복에 달았던 여고생 생각을 하였다.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작가가 되고 싶다 했던가? 헤세에 대해 담소하였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머리 속 가득 추억을 가득 담은 채 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

그렇게 닿은 곳이 야트막한 언덕 밑의 거북빵집이었다.


‘딸랑’


추억이 울렸다.


'그래, 추억이란 이런 것!'


칠순을 훌쩍 넘긴 주인 할아버지가 거북 등 만큼이나 갈라지고 쭈글쭈글해진 눈으로 언제나처럼 나를 반겼다 .

그 당시 , 무섭게 등장하기 시작한 프렌차이즈의 홍수 속에서도 꼿꼿한 삶을 사셨다.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한번에 몇 천 원 어치의 찐빵을 살 뿐이었다 .

새 알 크기 만한 찐빵은 얇디 얇은 껍질 안에 생명처럼 붉은 앙꼬를 가득 담고 있었다.

방금 쪄낸 뜨거운 찐빵을 입 안 가득 넣으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시절, 그런 류의 시간의 흐름에도 세월의 팍팍함이라는 게 있었을까 ?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추억해 보면 그때에는 찐빵 하나로도 행복했던 것 같다.

봉투 하나 가득, 찐빵을 사 들고 가게를 나설 때면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 보셨다. 그 눈빛에는 나에 대한 고마움과 반가움을 넘어서는 어떤 아쉬움이 늘 교차했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꼭 여쭤봐야지 했던 나는 결국 그 눈빛에 대하여 여쭤보지도 못했고 또한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의 나는 왜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언젠가 도장에 새겨진 서체의 획만 보아도 자신의 필체임을 단박에 알아보던 한 조각가가 그 길을 이을 후배가 없음을 한탄스러워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조각가는 혼을 불어 넣는 일에 큰 관심과 기대가 없는 이 세태의 태도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거북빵집 할아버지도 그런 아쉬움과 절박함으로 내 눈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니었을까?

여쭤 보고 싶다.

이제는 돌아가셨을 그 분께 여쭤볼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그 날의 날씨, 그 날의 내 마음.

그날 맡았던 찐빵의 맛과 향이 시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이편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 들 때가 있다.

바로 오늘이다.

난 이럴 때면 그때의 맛을 잃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가게는 없어졌어도 추억은 남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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