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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Jun 09. 2016

목욕탕 정기휴일엔

기억이라는 놈은

열쇠는 돌아가는데 문이 안 열린다.
주인 아저씨가 뭔가 감을 잡으신 걸까?
제대로 뿔이 나셨는지 샷시 문을 탕탕 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셨다.
이제는 목욕 안 하겠다는 말도 못하게 되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무에 그리 화가 나셨는지 쌍욕을 하시며 고함을 치셨다.

"아! 문 열어, 이눔아!'


내 기억이 맞다면 어린 시절, 안양유원지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다. 강원도 원주시로 전학을 가기 전이었으므로 3학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그 시절은 골목이 많았던 때다.

소풍을 가던 길은 괜찮았는데 오는 길에 물에 떠 다니는 오리배를 보며 걷다가 버드나무가 길 안쪽으로 휘어진 줄도 모르고 그대로 세게 부딪힌 기억이 있다.

줄곧 신동(神童) 소리를 듣던 나는 그 일 이후로 천재로 전락하였다 한다.


물을 바라보면 정신이 빠져 멍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세수하라고 받아둔 물을 한참이나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는데 사촌형님 중에 사슴처럼 커다란 눈을 가지신 분도 세숫물을 멍하게 바라보셨다고 하니 이게 어쩌면 눈이 큰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지나 모르겠다.

시골로 전학을 간 뒤에도 그런 버릇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한번은 그런 날 유심히 지켜보던 친척 중 한 분이 물과 관련된 아주 요상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날은 시제(時祭)가 끝나는 날이었다.


한국전쟁 때 이야기.
북한군은 민간인을 자기네 편과 상대편(대한민국)으로 걸러내는 게 아주 큰 골치였다고 했다.
사실 민간인은 이 편, 저 편도 아니었을 테지만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야 했던 모양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조각을 맞추어 보자면 그 방법은 이랬다.

어떤 마을에 유숙한 북한군이 이튿날 아침, 공회당에 마을 사람들을 모은다.
모인 사람들 앞에는 물을 가득 담고 있는 양은 세숫대야가 있다.
멀리 동이 트기 시작하면 한 명씩 나오라고 해서 물에 해를 비치도록 시켰다.
세숫대야가 붉게 물들 때, 빛이 들지 않은 곳에 푸른 빛이 돌면 그 사람은 총살형.
붉게 비추이는 물에 푸른 빛이 비추는 것은 태극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지만 이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고 했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어려워진 양은 세숫대야를 어쩌다 볼 때면 경험치 못했던 일이라도 그날 이야기가 생각나곤 했다.

기억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머릿 속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 있다가도 특별한 접촉이 있다 보면 툭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어떤 분의 글을 읽다 보니 '옥수장'이라는 사진이 눈에 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또 다른 기억을 꺼내 주었다.


앞서의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해야할까?

그 시절, 목욕탕 가는 것보다 매 맞는 게 낫다고 해야 할 정도로 목욕탕 가는 걸 싫어 했다. 그나마 서울에 살 때에는 억지로 끌려 다니곤 했는데 시골로 이사를 간 뒤에는 통 갈 일이 없었다. 그 시절, 목욕탕에 한번 가려면 몇 리를 걸어서 직행버스를 탄 뒤 시간 반이나 가야 시내에 있는 목욕탕을 겨우 갈 수 있었다. 가고 오는 시간도 아깝거니와 비용도 만만치 않아서 간 적이 별로 없었다.

여름에야 개울에 가서 멱감는다 했지만 기실 그렇게 해 봐야 시퍼런 물때만 가득 꼈는 걸.

어쩔 수 없이 방학 때에 아까의 형님 댁에 놀러 오면 그 틈을 타 목욕탕에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형님 댁 막내형이 나보다 두 살 터울이라 나와 내 동생은 형이 이끄는 대로 목욕탕에 고분고분 따라가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그렇게 싫던 것이 거뭇거뭇 수염이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목욕을 혼자 즐기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샤워를 하고 미지근한 물에 들어 앉아 있으면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구나' 할 정도로 나는 변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날이었다.

하교를 하던 중에 영화관 건넛편 길을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목욕탕이 있는 것을 보았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처음 보는 목욕탕이라 표를 끊으려고 보니 아뿔싸!


정기휴일이었다.


그랬다. 그 당시엔 평일에 하루는 목욕탕 정기휴일이었다.


'하아-'


모처럼의 호사를 못 누리게 된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서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주인 아저씨가 목욕하고 가라 하셨다.

아마 '청수장' 쯤 되는 이름이었을 그 목욕탕의 주인아저씨는 조금 전 물을 싹 갈아서 깨끗하니 목욕하고 가라며 돈을 내라 하셨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기분 좋게 돈을 내고 들어서려는데 '어라?'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이 잠겨 있다고 하니 매표소에 앉아 계시던 주인 아저씨는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나오시더니 문을 잡아 돌리는데 '어라리요?'

문이 정말 안 열린다. 손잡이는 좌우로 돌아가는데 문이 안 열린다.

몇 차례나 씨름을 하던 아저씨.

참 집요도 하시다.

내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담에 오지요.' 하는데도 굳이 붙잡고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열쇠 꾸러미를 갖고 오셨다.


'어라? 어라리요?'


열쇠는 돌아가는데 문이 안 열린다.

주인 아저씨가 뭔가 감을 잡으신 걸까?

제대로 뿔이 나셨는지 샷시 문을 탕탕 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셨다.

이제는 목욕 안 하겠다는 말도 못하게 되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무에 그리 화가 나셨는지 쌍욕을 하시며 고함을 치셨다.


"아! 문 열어, 이눔아!'


그런 소동 속에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남자가 휙! 하고 뛰쳐 나온다.


"저 눔 새끼!"하는 주인 아저씨의 고함을 등 뒤로 흘리고 사내는 골목으로 곧장 토꼈다.


등 뒤에 욕을 한 바탕하신 걸 끝으로 주인 아저씨는 흐뭇하고 한편 후련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 주셨다.


"아. 네. 네."


계면쩍은 모습으로 목욕탕을 들어서려는데 이번엔 무엔가 노루 같은 것이 후다닥 나를 밀치고 튀어나갔다.

나는 목욕은 고사하고 그만 심장이 짜부러들어 다리가 후들거렸다.

놀라기는 주인 아저씨도 마찬가지.

혼(魂)이 다 빠져 나간 아저씨와 심장이 다 쪼그라 든 채로의 나는 노루가 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는 노루처럼 날랜 '남자가 아닌 사람'이 달아나고 있다.


'아뿔싸!'


사태가 정돈 되고(?) 그새 정신을 차린 아저씨가 목욕탕으로 억지로 나를 밀어 넣었다.

텅 빈 목욕탕이 우주 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나는 무슨 짓을 한 것이란 말이냐.'


우주삼라만상에 대한 은 고찰 만큼이나 멍한 채로 시간을 떼우다가 서둘러 샤워만 끝내고 옷을 입었다.

주인 아저씨께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오니 맑았던 하늘에는 어느새 쥐오줌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새삼 목욕탕 정기휴일에는 목욕탕을 와서는 아니된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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