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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Jun 25. 2016

라면은 도구일 뿐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맛있다고 <아기 공룡 둘리>의 마이콜이 노래를 부른 뒤로는 원래 그 노래 부른 사람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구공탄을 본 적도 없는 나로서도-21공탄 세대였나?-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맛있다는 얘기를 어슴프레 들은 기억이 있다.

연탄 구멍이야 어찌되었든 연탄불 위에 남선표 알미늄 냄비를 놀려 놓고 끓여 먹는 삼양라면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한다.

하도 귀해서 라면 하나에 물을 많이 붓고 국수를 넣어 끓여 먹는 집이 많았는데 붇는 속도가 라면과 국수가 서로 다른 탓에 퉁퉁 불어 터진 면발을 숟갈로 떠먹곤 했다.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이 라면 한 봉을 완전하게 끓여 줄 때면 한 젓갈 한 젓갈 집어 먹는 그 맛이 정말 좋았다.

국물까지 쪽 빨아 먹고 나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던 시절의 이야기.

마이콜 덕분에 원작자의 이름을 잊어 버리고 사는 그 즈음의 얘기를 하나 풀어보려고 한다.




때는 아마도 막내고모 결혼식.

그렇게 많은 친척들이 있던 걸 모르고 지내다가 결혼식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알은 체를 하였다.

그중 '완이형'은 나를 무릎에 앉혀 놓고 놀아줄 정도로 나를 무척 예뻐했다.

정에 굶주렸던가?

안아 주고 떠먹여 주는 통에 결혼식이 끝난 후, 나는 구로동 집으로 가지 않고 시골로 가는 버스 위, 정확히는 완이형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

자다깨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주위가 깜깜해져 있었다.

잠결에 엄마를 찾고 우니 완이형이 나를 안아주었다. 형은 아마 그때 국민학교 오학년 쯤 되지 않았을까.

하여튼 그렇게 잠을 설치고 일어나니 별세계였다.


'하아~ 고것 참.'


앞에 산이 턱 있고 그 산과 이 집 사이에는 깊은 구렁이 있다.
저 건너편에도 커다란 산.

바로 뒤에도 산이 있었다. 아니지, '바로 뒤에는 산"이 아니라 '산자락에 이 집'이 있었다.

멀리에서 보면 커다란 두 개의 산자락이 내리닫는 곳에 몇 채의 집이 덩그러니 있었다.


'워메.'


산안개가 자욱한 곳에서 할 말을 잃고 있는 나에게 완이형이 와서 밥 먹자고 했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를 왔단 말인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방학을 여기서 보내겠다고 떼를 쓰며 완이형을 따라가겠다고 한 기억들이 어렴풋하게 살아났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뒤로 숨었던 동생처럼 왜 숨지 못했던 말이냐.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쫓아온 내가 원망스러워 닭똥 같은 눈물이 다 났다.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시골 삶은 더할 수 없이 바빠서 어린 아이들도 대부분 일손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내가 와 있던 터라 완이형은 짬짬이 자전거도 태워주고 썰매도 태워줬다.

바로 앞산 능선을 따라 올라 정상에 다다르면 멀리 단강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밑을 따라 또 얼마쯤 내려가다 보면 산자락 구석 구석에 조막만한 논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을 골라 물을 가두고 썰매를 타도록 얼음을 얼렸다. 논에 얼음을 가두면 그 안은 따뜻하기 때문에 이듬해 병충해가 많아져 얼음을 얼리 않는 것이 통례였지만 완이형은 심심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었다. 굵은 철사줄을 나무 판자 위에 바짝 붙인 후에 못으로 때려 박아 고정시키면 그게 썰매였다.

썰매를 타러 가는 길에는 작은 샘이 있었다. 돌로 쌓아 만든 옹달샘이었는데 노래로만 듣던 옹달샘을 보니 너무나 신기했다.

그 건너편 개울, 오리나무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딱따구리가 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나는 차츰 자연의 일부가 되어 갔다.

완이형이 만들어 둔 썰매를 신나게 타다가 목이 마르면 옹달샘에서 물을 한 잔 마신다. 돌아오는 길에 물초롱에 물을 가득담아 물지게를 지고 가는 형을 뒤따른다. 해는 뉘엿뉘엿.

겨울의 해는 다.

눈이 부시지 않다.

내 안에 그대로 들어와도 좋다.

완이형은 그렇게 그렇게 많은 것으로 내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냄새에 부엌을 들어가니 완이형이 화릿불에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어느새 막내 누이가 무쳐 준 묵나물의 나물맛과 꼬치장(고추장) 맛을 알아가던 참이었는데도 라면 냄새는 참을 수 없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화릿불에서 끓고 있는 라면을 건져 내어 호호 불어 주고 내게 내밀어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쪼옥 내밀고 눈을 감았다.

라면 향은 진동을 하는데 혀는 맛을 모르겠다.

눈을 떠 보니 완이형이 낼름 지입으로 가져 간다.

그렇게 몇 번 하고 나니 골딱지가 나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제서야 완이형은 한 젓가락씩 떠 먹여주었다.

그래, 이제는 알 것 같다.

완이형이 아끼던 것을 나를 위해 일부러 끓여 준 것을.

형도 무척이나 먹고 싶었을 테지.

그걸 형이라는 이유로 한 두 젓갈로 참아내었다.

형이라는 이유로 늘 동생보다 좋은 것으로 받았던 내가 이제서야 느끼는 깊은 소회다.

요새 사람들도 라면 하나로 충만한 기쁨과 눈물 뭉클한 아련함을 느낄 수만 있다면...

하루 빨리 경동시장 국수, 우동 번개 모임을 가져봤으면...




어쨌든 세상에서 제일로 맛있는 라면을 홀딱 헤치운 후 형은 강냉이 말린 걸 가지고 나오더니 닭장으로 가더니 몇 알씩 뿌렸다. 맨날 땅이나 거름밭을 뒤지던 들이 강냉이를 뿌리니 눈이 뒤집혔다.

완이형이 뿌리는 대로 이리저리 잘도 따라왔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깽깽이 발로 따라가니 어느새 모중모탱이 할머니 댁 앞이었다.

거기엔 눈이 부시도록 하얀 예쁜 닭이 있었다.

형네 닭은 색이 붉고 군데 청록빛 깃을 세운 토종닭이었지. 그놈이 무서운 이미지라면 이 녀석은 참 예뻤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형이 그 닭 앞에 가서 이소룡 흉내를 내라 했다.

뭐냐하면 한쪽 발을 들고 닭 눈 앞에서 '아뵤오~~' 소리를 내며 발로 깐쪽거리라고 했다.

몇 번 연습한 후에 보무도 당당하게 눈이 부시게 하얀 닭 앞에서 깐족거렸다.


'형아, 이렇게?' 하며 형을 보며 웃고 다시 닭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나를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며 달려드는 닭을 피해 꽁무니를 빼야 했다. (닭은 발로 깐족거리는 걸 공격 신호로 알아 듣는다.)




그날 오줌을 지렸는지 안 지렸는지.  

완이형은 바로 며칠 전의 복수극을 위해 그 라면을 끓였던 거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글을 쓰며 아빠 미소를 짓게 된다.

카페 사람들은 아까부터 히죽거리는 내가 궁금할 테지.

아니, 궁금해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행복했던 때를 추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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