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그림 : 용가리우스
잠이 덜 깬 모양이다.
몸이 노곤하고 나른한 것이 꼭 토요일 같다.
코트를 입은 채 귀마개를 하고 벗지 않은 채 버스를 타고 지하철까지 오다 보니 문득 귀마개 벗겨내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볼 만했다.
어젯밤을 불금처럼 보냈기 때문일까?
사색이라는 단어로 가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름 느낀 바 있어 열정을 담아 시간을 보냈다. 그래, 아마 그랬기 때문일테지.
마음이 포근해져 와서 오랫만에 단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멍한 느낌은 사실, 피곤하거나 잠이 덜 깬 느낌이 아니라 오래 전 그때가 연상되는 때문인 것 같다.
아마 날이 맑은 토요일 하교길이었지. 포근한 하교길이었다.
같은 반이었던-사실 반은 하나였다- 철이와 아룻말에서 혼자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산자락 샘물이 나오는 곳을 지나니 방앗간이었다. 추수가 지난 지 한참이라 햇볕을 받은 낡은 지붕이 칠이 벗겨진 채 붉은 빛이 났다.
저만치 앞에 있는 물탱크를 돌아 몇 걸음만 지나면 OO골로 들어서는 좁다란 오솔길이 있었다. 언젠가의 완이형이 자전거에 나를 앉히고 자전거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아룻말 철이네서 OO으로 들어서는 길이 지금에야 넓다란 세멘길로 포장되어 있지만.그 옛날에는 좁은 자갈길이었던 탓에 큰비.내리면 자주 끊기기도 했다. 그런 때면 논둑을 밟고 이리저리 돌아 집으로 가곤했다. 이때는 아직 이곳으로 오기 전이라 큰 물난리는 겪지 않은 초겨울쯤의 어느 날이었다.
걸음을 꽤나 걸은 뒤라 OO골로 오르는 초입을 숨가쁘게 오르고 나니 S형네 마당이 요 앞에 바로, 날은 포근하다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던 모양인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S 형의 어머니였다.
둥그러니 커다만 눈을 뜨시고는 학교 갔다 오는 길이냐며 인사를 하셨다.
가뜩이나 숫기가 없는 데에다가 모든 게 낯선 때라 아주머니를 향해 고개를 말없이 숙이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밥 먹고 가라고 하셨다. 서울에서 살다 온 지 얼마되지 않은 나에게는 밥 먹고 가라는 것은 이른바 문화충격이었다. 나를 뭘로 보고 밥응 얻어 먹고 가라는 건지, 처음에 서울에서 온 아이들이라며 교무실에 조롱조롱 맺혀있던 아이들도 기실 우리 가족이 그다지 좋은 상황으로 온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된 뒤로 한동안은 힘든 대접을 해준터라 알 수 없는 아주머니의 호의가 사실 두려웠다.
'학교에 이번에는 어떤 소문이 돌까?'라는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아주머니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에 꼭 쥐어진 채 마당을 들어서고 있었다.
S형은 어느새 간유리 미닫이 문에 매달려 혀를 쏘옥 뺀 채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억지로 앉혀 놓은 자리에는 겨울 토끼털처럼 폭신하게 보이는 재가 화리에 수북했다. 고구마를 굽는거라고 했다. 센 불에 굽지 않고 뜨거운 재로 덮어 두어야 타지 않고 알맞게 잘 익는다며 S형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 주저리 잘도 풀어내었다.
화릿불 위에 삼발이-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를 한쪽에 올려 놓고 누런 양푼에 밥을 퍼담아 오신 아주머니는 배추가 걸어나갈 것처럼 덜 절여진 시퍼런 김치를 또 역시 그 양푼에 척, 이번엔 고추장을 턱, 들기름을 촥,
볶음밥이라고 해 보아야 계란볶음밥이나 김가루를 묻혀 낸 것, 아니면 콩나물 볶음을 다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이 아쉬워 뜨신 밥을 넣어 비벼 먹은 게 다였던지라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우물쭈물거렸다.
수저도 어른 수저.
나는 통 입맛을 잃을 참이었다.
'치이익~' 불쏘시개를 가지고 재를 살살 쏘삭거리자 어엇! 시뻘건 숯불이 살아 있다. 그 열 다 받고 뜨거워진 양푼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밥을 볶아내는 거였다.
낯선 내 남자의 향기가 나를 붙잡는다고 했던가?
아니다.
낯선 들기름 내음이 나-'나'라고 쓰고 '나아!'로 읽어야 한다-를 붙잡았다.
왠만하면 먹지 말아야지 하던 나는 언제.먹으라고 하려나 하는 표정으로 보았다 한다. 드디어 밥이 다 볶아져 한 술 뜨게 되었을 때의 그 황홀함이란...
이런 말이 있다. 음식 냄새를 많이 맡으면 그 음식을 못 먹는다는...
'음핫하하하하하'
대답 대신 크게 웃어 드릴테다.
잠깐 사이에 밥을 다 비우고 고구마 몇 개를 집어 마시고 쨍한 동치미를 마셔대고 S형이랑 까불고 놀다 보니 시간이 꽤나 지나 있었다.
늦게 돌아온 엄니는 내가 쫑알거리는 얘기를 들으며 입으론 야단을 치시면서도 눈으로는 웃으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