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소풍 가던 날.
올여름, 밤이 퍽 길다.
더위 때문에 잠을 설치다 보니 자다 깨다를 벌써 여러 번.
밤이 퍽 길다.
스마트폰의 날씨 정보를 살펴 보니 서울 29도, 습도 85%.
이른 봄, 고추 모종을 내야 하는 비닐하우스의 온도와 습도가 이쯤 되었으려나?
자리끼 한 잔을 마시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오늘 아침 뉴스에 1970년대, 1980년대의 더웠던 여름을 소개하던데 그때도 해수욕장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와 수영복은 아주 비싸서 부잣집 아이들, 그것도 아주 극소수만 입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아침 뉴스를 생각하다 보니, 어릴 적 방앗간 앞 너럭바위에서 보를 만들어 발가벗고 수영을 하던 생각이 났다.
날이 더운 때라면 언제랄 것도 없이 동생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미리 나온 아룻말 아이들이 바윗 속에서 드글드글.
논두렁 방천한 경험이 많은 솜씨 좋은 형들이 너럭바위 밑으로 세차게 흐르는 여울물을 '말 가웃'은 될 법한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옮겨다 자리를 잡고 논흙을 퍼다 발라 제법 근사한 보(洑)가 생겼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철에도, 이를테면 방학 내내 담뱃잎을 따야 하는 끈적거림에서도 그 보 덕분에 제법 시원한 여름을 날 수 있었다.
여름 방학이 끝난 뒤에도 9월 말, 10월 초까지는 습한 정도는 나아져도 그야말로 타들어갈 듯한 뙤약볕이 하루종일 내리 쬐었다.
그날은 가을 소풍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혈기 방자하던 때였는데 소풍 날이다 보니 들뜬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와 몇몇 놈들은 그날 소풍에 가기로 했던 합수머리를 잽싸게 한바퀴 돌고 오자며 자전거를 집어 들었다.
평소 학교 담벼락 자전거 보관소에는 임자 잃은 자전거가 몇 대 쯤 있었는데 그 중 나는 노란색 싸이클을 집어 탔다.
아침 일찍, 내달리는 자전거가 그야말로 경쾌하다.
'면사무소'를 지나 '차부'를 지났다.
'이 약방'까지 약간 언덕길이지만 그까짓 것, 혈기 방자함으로 밀어낸다.
'연우네 식당'을 지나서부터 우리집이 있는 버덩말 삼거리까지는 내리막길이었다.
이른 아침, 시골길 앞을 가로막는 일이란 없었다.
속도가 하도 빨라서, 어느새 헛바퀴질.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버덩말 우리집을 스치듯 지나고, 가로수도 하나, 둘 지나고
저 앞에 삼거리가 보였다.
이제 저기를 코너링하면 오늘 아침 가 보려던 강가로 내 달릴 수 있었다.
언덕을 다 내려오고 평지로 이어지니 제법 다리에 힘이 실렸다.
박차를 가하는 대로 나를 태운 자전거에 그 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상쾌했다.
붕~
털썩
하늘을 날아 올라, 버덩말 논바닥으로 추락한 나를 찾는 소리가 다급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나를 들어 올렸다.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데 나오지가 않았다.
부임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 선생님의 호통 치는 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소풍 날에 장례 치를 뻔했다고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셨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얼마나 놀라셨을지.
버덩말에서 강가로 나가는 큰길에 나가려는 순간, 시내로부터 들어오는 차를 보았고 이대로라면 부딪히겠다 싶었는데 아뿔싸, 브레이크가 고장나 있었다.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내가 훌쩍 뛰어내려 몸을 몇 바퀴 구르든지, 아니면 더 빠르게 페달을 밟아 자동차를 앞서 지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앞설 수 있다는 무모한 생각을 했고, 다행히(?) 앞서기는 했지만 나는 그대로 논바닥으로 추락.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난데없이 끼어든 자전거 때문에, 그리고 그 자전거가 어떤 놈을 달고 그대로 날아가는 모습을 면전에서 보았기 때문에 놀란 나머지 멍한 채로 있다가 뒤이어 달려 든 친구 녀석들과 나를 끄집어 올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 이외에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지만, 사회 선생님은 몇 번이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하한의 이유로 '독박을 쓰셨다' 들었다.
그렇게 인사도 없이 떠난 선생님의 함자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나라는 놈은 참말 못 쓰겠구나 싶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을 핑계 삼아, 그 선생님에 대한 에피소드를 추억해 보고 글로 써 보니 기분이 꽤나 좋다. 얼마 전에 사 두었던 맥주를 이런 때 쓰는 것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