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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젊은느티나무 Jun 19. 2020

메밀꽃 메타포

이효석 선생 덕분에 '사랑의 약속'이라는 예쁜 꽃말을 지닌 메밀꽃은 가족의 애틋한 연을 이어주는 메타포가 되었다.



작가의 세심한 붓 터치는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까지 젖어 들게 만든다. 여름은 밤이 짧은데 선생 덕분에 몹시 길어졌다. 선생의 미묘한 감정선이 내게도 흐르고 마침내 전이되어서이다.

'작가'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는 까닭이다.

글을 읽는 읽다 보면 어느새 귀 기울여 듣게 되고, 선생이 피워둔 화톳불을 함께 쪼인다. 또, 선생이 세워둔 집에 들어가 앉는다.

그러다가 왼손으로 채찍을 든 손을 보면서 가볍게 눈을 흘기고야 만다.

은하수로 돌아가신 선생은 알고 계실까?

당신의 메타포 덕분에 여름 밤을 뜬 눈으로 새우는 이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세상에! 여름 밤처럼 낭만적이고 함축적인 걸, 선생처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이가 또 있을까?

내가 선생에게 눈을 흘기는 이유이다.

어느새 선생이 소천(召天)하시던 때의 나이보다 많아진 이 중늙은이 또한 선생을 생각하며 글을 쓰며 긴 여름 밤을 채워 보려고 한다.

나의 메밀꽃은 어느 지점에서 선생과 맞닿아 있을까?



“메밀 묵 사리어~, 찹쌀~떡.”


여름 밤 적막을 깨우는 소리에 몸이 발딱 일어나 슬리퍼만 신은 채로 뛰어 나갔다.

이번엔 놓칠 수 없다.


“아저씨~~~!”


골목을 돌아나가는 아저씨를 놓칠세라, 큰소리로 불렀다.


‘아뿔싸’ 


‘오늘도 놓쳤나?’


묵을 그다지 좋아하는 세대는 아니었지만 돌아가신 아빠와 나를 잇는 매개체였다는 생각이 들자, 한번은 꼭 사먹으려는 생각이었다.


“어떤 걸 드릴까요?”


우리 집 현관 앞으로 돌아 온 아저씨가 물었다.


“찹쌀떡, 메밀묵 하나씩 주세요.”


“네, 고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에는 양재동 일대에도 여름 밤에는 메밀묵 장사가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비교적 한산하던 동네였는데 어느 날부터 나타난 메밀묵 장수의 호객하는 소리는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엄마로부터 지난 얘기를 들은 뒤, 그러한 생각은 일종의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여보, 일 나갔다 왔는데 다시 나가야 하나요?”


서둘러 저녁을 해치운 뒤, 잠든 나를 한번 안아보고 메밀묵 가방을 짊어지고 나서는 엄마가 아빠에게 물었다.


“내, 다녀오리다.”


1970년대의 구로동 412번지 일대.

몸 하나만을 믿고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이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도 작은 골방 하나를 빌어서 시작하셨다고 했다.

빈한한 살림에도 '보석 같은 아이들'이라며 행복해마지 않던 시간들.

아빠는 공장 일을 다녀온 뒤에도 어김없이 밤이면 메밀묵을 팔러 다니셨다고 했다. 

은하수가 빛나던 밤, 땅에는 보석들이 빛났다.

나와 이효석 선생의 메타포가 맞닿아 있는 지점을 이야기하려면 메밀묵을 팔러 다니던 아빠를 포함하여 삼대(三代)에 걸친 가족사를 짧게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도 열심히 살려고 하셨던 아빠는, 내가 세 살이 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서른 세 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암과 백혈병으로 수 년을 살았던 것을 제외하면 그리고 새어머니(내게는 새할머니) 이후로 곤핍한 삶을 그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더 제하고 나면 그에게 정말 행복했던 순간은 엄마와의 만남과 결혼, 나와 동생의 탄생,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가정을 꾸리려 밤늦도록 일하던 그때가 전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따금 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큰 병에 걸린 채로 가족의 돌봄을 받는 삶을 조명할 때가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럽구나.” 말씀하시곤 했다. 

나도 애틋할진대 엄마의 마음이야 어떠할까? 긴 병수발 뒤, 남편을 여읜 뒤의 빈터에서 홀로 견뎌야 했던 어머니의 삶. 그때 나는 고작 28개월, 동생은 100일 즈음이었다.

어려운 생활을 견디다 못한 엄마는 내가 열 한 살 나던 해에 아빠의 고향인 강원도 OO으로 가기로 큰 결심을 했다. 위로 띠 동갑을 넘는 친 동기-자기 소유의 3층짜리 주택이 있었던-들이 있었지만,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돌봄을 받지 못했던 엄마의 절박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려 간 곳은 하마 오래 전에 폐광이 된 작은 마을, 마을 주민의 9할 이상이 일가 친척인 집성촌이었다.

엄마는 ‘핏줄이니까 당긴다’는 옛말을 순진하게 믿고 의탁하러 가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의 핏줄이니까 거두어줄 것이라는 걸 믿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픽업트럭 하나에 실은 게 살림살이의 전부였던 우리를 달갑게 맞는 친척들은 없었다. 

폐광인 작은 농촌마을의 삶이란 게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 시골에도 여유가 있는 댁은 컬러TV를 보던 시절이었는데 정말 돌볼 처지가 못되었는지는 말을 아껴두기로 한다.

전학을 갔던 때는 11월.

벌써 눈발이 날렸다. 

아궁이에 지필 나무도 없어서 급한 대로 남의 산에 가서 멋대로 청솔가지를 잘라다 떼었다. 그때의 매캐함이란. 정말 타지도 않는 나무를 떼는 통에 온 마을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다.

냉골에서 잔 적도 허다하게 많았다. 엄마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해였다.

기대와는 달리 뒤웅박 신세가 된 셈이었다.

우연히 사정을 알게 된 학교 동창이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어 그 해 겨울을 날 수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작은 재 너머의 집을 새로 구해야 했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골짜기 사이에 있는 둔덕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다. 중간에 있다는 뜻의 그 마을은 그래서인지 적막하고 고요하면서도 볕이 따듯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옮긴 뒤에야 비교적 안온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사실, 아빠는 위로 형님 한 분과 한 할머니 배에서 난 형제였다. 그 할머니께서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시고 새할머니(아빠에겐 새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 배에서 나온 다섯 동생들, 그러니까 내게는 삼촌과 고모들은 전부 배다른 형제였다.

이제 와서야 새삼스레 위로 둘, 새로 낳은 자식들 다섯을 거둬 먹여야 했던 할머니의 상황을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내 나이쯤 되고 나니 당시, 몰락한 친가의 삶이 퍽퍽하던 시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나 할까?

늦은 감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린 시절, 종교에 깊이 심취한 채로 왜 할머니를 용서하지 않느냐며 어머니에게 철없이 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의 호소는 지금에 와서 느끼는 감정과는 사뭇 다른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어쩌다 그 무렵이 생각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있다.


“엄마는 언제부터 마음이 든든해졌어?”


"응?”


“우리가 든든해지던 때가 언제쯤부터야?”


“너희가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교 붙었을 때. 이제는 정말 고생이 끝났구나 싶었지.”


"그랬구나."


사립대학교에 붙으면 마을 어귀와 면사무소 건너편 가로수부터 이쪽 편까지 현수막을 걸어주던 곳이었다.

작디 작은 시골.


<OO대학교 경제학과 합격>


당숙께서 길에서 만난 나와 어머니를 식당으로 무작정 끌고 들어가셔서 백숙을 사다 주시던 기억이 난다. 

수원으로 일을 다니시던 둘째 숙부가 현금 십 만원을 주시던 기억도 난다.

사립대학교 등록금이 백 오십만 원 하던 시절, 국립대학교를 다니던 동생의 등록금이 오십 여 만원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기쁜 얼굴을 하고 그 돈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 무렵쯤이었구나. 근데 엄니는 우리 서울에 데려다 놓고 혼자서 어떻게 지냈어?”


행상을 해서 근근이 풀칠을 해야 했던 어머니는 방학에는 줄곧, 대림동에 사시는 이모에게 우리를 맡겨 두곤 했다.

밤을 유달리 무서워하는 어머니는 어떻게 그 산속 작은 집에서 홀로 지낼 수 있었을까?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신 내림을 받은 분이 사시던 곳이었다.

우리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삼촌들이 챙겨주는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대학을 다니며 머리가 굵어진 나는 그 무렵부터 꽤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을 한다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태도를 보였다. 

친척 모임이 있을 때에는 으레 과거 일들을 들추며 (우리를 잘 돌보지 못한) 어른들께 부끄러운 줄 알라는 식의 얘기를 서슴지 않고 했다.

그러기를 여러 해.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늘 가득했다.

이 선배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횡성군 갑천이 태생인 이 선배는 나와는 다섯 살 터울이었다.

선배와 속 이야기도 나눈 사이가 된 어느 날, 차에 타라고 하더니 무작정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고향은 남한강 상류가 있는 곳으로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예로부터 문객들이 자주 찾고 천년 사찰도 세 곳 정도 된다.

강변을 끼고 달리기 시작한 지 삼십 여분쯤 지났을까?

할머니가 계시는 마을로 들어섰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선배?”


말도 없이 차를 끌던 선배가 이내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우리 할머니의 집.

선배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할머니~”


눈썹이 짙은 선배, 눈망울도 선한 그가 할머니를 크고 정답게 찾았다.

고향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 받은 그가 유일하게 위로 받는 방법이 주말마다 독거 노인들을 살피는 일이라니. 그것도 우리 할머니라니.

하릴없이 차에서 내려 문간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무릎을 젖 무덤에 닿을 정도로 옹그린 채로 봉당에 기대어 앉은 할머니가 반색하며 이 선배를 맞았다. 

그 사이, 너무 늙으셨다. 할머니는 더 이상 감정의 소모대상이 아니었다. 

이윽고, 등장한 내 모습에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너무 놀라셨다.

나와 선배의 관계가 궁금한 모습이었다. 

회환이 섞인 반가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하다.

이내 몸을 일으킨 할머니는  부엌으로 가시더니 솥뚜껑을 들고 나오셨다. 

못내 불편한 나는 그 사이 몇 번이나 선배에게 어서 가자고 눈짓을 보냈지만 예까지 온 선배는 당연히 무시했다.

그 사이, 불을 피우고 솥뚜껑을 올리고 들기름을 둘렀다. 고소한 향이 코를 찔렀다.

깨끗이 씻어온 쪽파를 깔았다. '취이익’ 사나운 소리를 냈다.

메밀 반죽을 한 국자 떠서 가볍게 돌려 치셨다.

하얗게 익어가는 메밀 반죽, 마닐마닐하게 익어가는 할머니 곁에 이 선배가 더욱 더 손자 같고 살갑다. 

핏줄처럼 보였다.

부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선배가 얇게 구워진 메밀 전 한 장을 접어 입에 욱여 넣어 주었다.

꿀꺽하며 넘기려는데 목이 아팠다. 눈물로 삼켜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전(煎)은 잔치의 음식이다.

화해야말로, 잔치 중의 잔치가 아닐까?

그날 먹은 메밀전은 확실히 화해의 메타포이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엄마는 할머니를 이따금 찾아가 뵈셨다. 

아마 이 때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여자로서 할머니를 보니, 너무 불쌍한 거야.”


할머니 댁에 다녀오신 어느 날, 불쑥 말을 꺼내셨다.


“초혼인 줄 알고 오셨는데 하룻밤을 치르고 난 뒤에야 재치라는 걸 알게 되셨대.”


할머니는 생각지도 못했던 두 아들을 품으셨던 게다.

나는 새삼, 왼손으로 채찍을 쥔 동이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이후의 일들이란 말할 것도 없다.

내게 여름 밤이 길어진 까닭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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