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단 둘이 떠난 스페인 여행
긴 비행 끝에 오후 5시경 바르셀로나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낯선 땅을 밟자마자 무서움이 피어올랐다. 이방인이 된 것이 새삼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아빠를 책임지고 일주일 간의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막막한 기분이 몰려왔다.
나는 심각한 길치에 맛있는 음식점도 잘 못 찾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과연 여행을 잘할 수 있을까. 매번 남편에게 의지해서 따라다니던 내가 리드할 수 있을까.
공항에서 버스를 타러 가는 길부터 역시나 쉽지 않았다. 원래 이용되던 표지판에 'X'자가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글자는 이해도 못하겠고, 가는 길은 봉쇄되어 있고, 안내는 부정확하고, 아빠는 옆에서 불안하신지 계속 재촉하셨다. 그러던 와중 극적으로 한국말이 들려오자 홀리듯 그분을 쫓아갔다. 아빠가 뭘 알고 따라가는 거냐고 물으셨지만 일단 귀를 막고 따라갔다. 다행히도 'Aero bus'라는 작은 표지판 뒤에 사람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미리 어플을 통해 구매한 표의 QR을 찍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 드디어 시작이다.
낯선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지나쳐 사라져 갔다. 건물 하나 가로등 하나에 서울부터 지니고 온 상념을 하나씩 매달아 걸었다. 그렇게 멍을 떄리다 보니 아빠의 독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분 뒤에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알고 있냐고 물으셨다. 내가 그걸 알리가 있나. 이상한 발음의 정류장 이름만을 알고 있을 뿐인데. 아빠와 허둥 지공하고 있으니 옆에 계신 한국분이 구글맵을 통해 현재 위치가 어딘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역시 낯선 땅에 떨어지면 성장하는 법이다.
버스에서 무사히 내리는 것까지는 임무를 완수했으나 사실 가장 큰 걱정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에 어떻게 무사히 입장할 것이냐는 문제였는데 숙소 근처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관계자 분이 나와계셨다. 열쇠로 문을 여는 법부터 집안 구석구석의 사용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관계자분이 돌아가고 아빠와 단 둘이 숙소에 남겨지자 혼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숙소의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머물 우리의 거처다. 이 공간에서는 위험도 없고 당황할 것도 없다. 머물 공간이 생기고 나니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후 6시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아빠를 위해 식당에 가는 대신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봐오기로 했다. 두 번, 세 번 현관문이 어떻게 잠기고 열리는지 확인하고 가방도 옷 속에 단단히 메었다. 마트에 들어가니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잔뜩 널려있었다. 꼼꼼한 아빠는 신중하게 과일을 살펴보고 계셨고, 성격 급한 나는 그동안 마트를 한 바퀴 휙 돌아보았다.
이방인의 단점은 다양한 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쉬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조리 없이 먹을 수 있는 과일, 빵, 요플레, 물 등 간단히 사서 들어왔다. 만약 다시 그곳에 간다면 파스타라던지 간단한 요리를 시도해 보았을 것 같다.
가져온 컵밥을 하나 데우고 과일과 요플레로 샐러드를 만든 채 간단히 식사를 끝마쳤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로 잠이 들었는데 아빠는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셨다고 했다. 새벽 2시 잠이 깬 나와 잠들지 못한 아빠는 산책을 나섰다. 여행의 설렘이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킨 순간이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이 밤새 내린 빗물에 녹아있었다. 처음 마주했던 담배연기와 소란스러운 사람들이 텅 비어버린 어둡고 조용한 공간을 걷고 있자니 점점 이 땅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처음 사귄 친구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목적지를 어디로 정할까 고민하다가 지도상으로 가까운 거리에 성바울 수도원이 있길래 그곳을 찍고 돌아오기로 했다.
지저분한 골목길을 굽이굽이 지나서 도착한 성바울 수도원의 어두운 외관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길가에 서서 아빠와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행인분이 말을 걸어왔다. 이곳은 외국인들이 있기에는 위험한 곳이니 빨리 나오라고, 우리를 지켜주듯이 같이 골목을 걸어 나와주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을까. 알고 보니 그곳은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곳이라 밤에는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야심한 새벽에 단 둘이 찾아간 것이다.
따뜻한 설렘에 허물어졌던 경계심에 경종이 울려졌다. 잔뜩 긴장을 한채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행히 아빠도 2시간 정도 푹 주무셨다고 했다. 일어나 보니 지난 새벽은 아련하게 지워졌고 현실의 하늘은 맑기만 했다. 기운을 조금 차린듯한 아빠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서 굳게 닫혀있었던 테라스 창살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 나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14시간의 비행시간을 견뎌 날아왔구나. 새벽까지만 해도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찾아온 혼돈감에 정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음이 차분하게 녹아내렸다. 아 이 순간을 나는 너무나도 바랬었구나.
이국적인 풍경에 한껏 신나 아빠와 좁디좁은 테라스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찍힌 사진을 바라보며 내가 진정 이 사진 속에 속해있는 것이 맞는지 바라보고 또 확인했다. 아빠와 아침을 간단히 먹으면서 가기로 한 성가정성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3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천천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숙소 인근의 평범한 주택가를 지나고 나니 점점 관광지와 가까워지면서 정돈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마주한 건물은 바르셀로나 대학교였다.
대학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1층의 높이는 성인 남성 키의 2배를 훌쩍 웃도는 높이였고, 벽을 이루고 잇는 돌들은 세월이 느껴졌다. 건물의 문은 나무로 이루어진 고풍스러운 대문이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이 문이 유지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부도 돌바닥, 샹들리에 등 기존의 것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어서 새로운 것은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뿐인 것 같았다. 이런 엄청난 곳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괜스레 부러워졌다. 이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퍽 감동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대학교 뒤뜰에는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 나무들이 연이어 심어져 있었는데, 빛바랜 대학교를 장식하는 싱그러움에 기분이 좋아 아빠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기다란 담벼락을 따라, 끝없는 돌바닥을 따라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