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단 둘이 떠난 스페인 여행
북적북적한 인파에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어마어마한 높이와 규모의 성당이었다. 아직 스페인까지 온 것에 대한 당위성을 마땅히 찾지 못한 둘에게 성가정 성당의 모습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 현장의 생생한 감동은 사진과 비할 바 못되구나. 책, TV 프로그램을 통해 숱하게 봐왔던 모습이지만 그 기억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멍하니 외관을 바라보다 인파에 치여 정신 차린 아빠와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에 천천히 외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동, 서, 남, 북 4면의 모습이 다 달랐기 때문에 찬찬히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성가정성당에 입장하고 나서 녹음된 가이드를 통해 설명을 들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일단 눈으로 느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했지만 천천히 바라볼수록 난해한 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갈비뼈의 모습과 같은 조각,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첨탑, 직선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다양한 곡선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상징하는 다양한 조각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이었지만 아빠와 내가 그 성당을 보고 느낀 감정은 동일했다.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감정이 너무나 뚜렷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한국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오랜시간에 걸쳐 혼신을 다해 지어진 모습을 비교하니 더욱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조금은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입장할 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했다. 평소 맛집을 찾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아빠와 다니는 여행이다 보니 안 찾을 수 없어 평점을 보고 식당을 찾아놓았다. 하지만 그 식당이 마침 휴일이어서 헛걸음을 하고 말았다. 애써 찾은 식당을 못가게 되고, 관광지 인근이라 어느 식당을 가던 비싸고 딱히 맛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운이 쭉 빠졌다. 게다가 생각보다 숙소에서 많이 걸어온 상태라 그냥 바로 앞에 있는 빠에야집으로 들어갔다.
빠에야 집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나오기 전에 든든히 아침을 먹은 차라 둘 다 입맛이 없어 도저히 빠에야를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뽈뽀(문어다리구이) 하나와 연어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한참을 기다리다 뽈뽀가 먼저 나와서 아빠와 나누어 먹는데 배가 너무 불러 다음 메뉴를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사이드메뉴와 같은 메뉴가 나와서 서비스인가? 생각했지만 아빠가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종업원을 불러 확인해 보니 음식이 잘못 나온 거라고 했다. 먹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으면서 불안감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메뉴인 연어스테이크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역기를 켜서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았다. (이때는 몰랐지만 가게나 건물 안에서 자체적인 와이파이를 써서 그런지 로밍한 데이터가 죽어도 터지지 않았다.)
종업원을 불러 손짓 발짓하며 우리의 스테이크가 언제나 오냐고 묻자 곧 나온다고 하셨다. 그래서 계속 기다리는데 옆테이블에서 한국어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영어를 쓰니 말도 잘 안나오고, 번역기는 안 터지고 답답하던 차에 아빠가 옆자리에 말을 대신해 줄 수 있느냐 부탁하셨다. 처음에는 민폐 끼치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사실 그 모녀의 도움이 간절했었던 것 같다. 우리 대신 종업원을 불러 우리가 주문한 연어스테이크가 나오지 않아 물어봤더니 기다리라고만 했다는 상황을 설명해 주셨고, 우리의 주문이 누락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 배불러서 주문이 누락됐다는 말이 너무 반갑기도 하고, 왜 우리의 주문을 누락시킨 건지 서럽기도 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아빠는 옆자리 분들에게 어떻게 여행을 오게 된 것인지, 몇 살인지 물어보셨다. 수능이 끝난 딸과 엄마의 대학 입학 전 여행인 모양이었다. 영어도 못하고, 식당에서도 당황해하며, 여행을 제대로 리드하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많이 의기소침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래 항상 부러워만 하던 부모님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내가 지금 온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재정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큰마음먹고 온 것인데 이런 것들에 주눅 들 필요 없지 하며 우울감을 날렸다.
그렇게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아빠와 드디어 성가정 성당에 입장하기 위한 줄을 섰다. A, B. C. D 등 입구가 너무 다양해서 어디에서 줄을 서야 할 것인지조차 몰라 무서웠지만 식당에서 기세를 얻은 나는 최대한 관광객이 많이 보이는 줄에 섰다. 입장권이 있는데 못 들어갈 이유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무사히 입장을 하고나니 긴장이 풀리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말로만 듣던 성가정성당에 들어가다니.
들어가자마자 길게 뻗은 기둥들과 천장에 뚫린 작은 구멍들 사이로 내리쬐는 빛들에 숲 속에 온듯한 느낌을 받았다. 산에 놀러 갔을 때 나뭇잎이 살랑이는 모습을 좇다가 고개를 뒤로 한껏 제쳤을 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나뭇잎을 한 아름 부수고 내려오는 빛이었다. 그때 느꼈던 평안함과 생명력이 느껴졌다. 실제 그 장소에서 느껴져 오는 감동은 참을 수 없이 생생하고 또렷했다.
먼저 종탑에 올라 구경을 한 뒤 천천히 1층을 감상하고 싶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종탑으로 올라갔다. 바르셀로나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감상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폭이었는데 종을 치기 위한 사람을 위한 계단이라 좁은거라고 했다.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종을 치기 위해 계단을 올랐을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얼마나 그 사랑이 깊고 경건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1층으로 다시 내려와 마련된 의자에 앉아 내부를 한참 바라보는데 건축물보다는 자연을 더 좋아하는 아빠가 이제 그만 장소를 옮기자고 하셨다. 아빠가 예술작품들에 흥미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빠른 자리이동에 당황스러워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화장실 옆에 작게 마련된 가우디 전시관을 들어갔다.
그리고 아빠는 거기서 마주한 한 문장에 순식간에 건축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이 먼저고 그다음이 기술이다.
(정확한 문장의 표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우디가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기술 덕분이 아니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의 건축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 문장에 아빠는 완전히 압도당하셨다. 여행이든 책이든 각자만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는 듯한 순간이 있어야만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빠에게는 이 문장이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가족이라는 의미의 성가정 성당을 평생을 바쳐지어 나갔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높지 않게 성당을 지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부들의 아이를 위해 학교를 건축했다.
이 일맥상통되는 가우디의 철학에 감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또 많이 감동한 나머지 계속해서 가우디 얘기를 하시고,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내며 자랑하는 모습에 더더욱 뿌듯했다.
가우디 전시관을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다음날은 몬세랏 수도원으로 가는 패키지가 일찍 시작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다.
저녁을 먹을까 했는데 시차 때문에 몹시 피곤했기에 집에 돌아와 간단히 샐러드와 컵밥을 나누어 먹었다. (다시금 후회되는 순간이다. 파스타라도 요리를 해서 먹었더라면 든든히 식사를 할 수 있었을텐데.) 시차적응과 맞지 않는 음식, 제한적인 활동 등등 다양한 현실적 요소들을 보며 더더욱 더 늙으시기 전에 여행을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편에..)